기억해야 할 그날의 이야기

눈감은 널 2시간 쓰다듬었어,
엄마랑 얘기하는 거 좋아했잖아

열아홉 살 가영은 ‘옷으로 엮어내는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목원대 섬유·패션디자인학과 2학년 박가영. “엄마, 나 패션 무대를 만들어보고 싶어. 그러려면 옷을 알아야만 할 것 같아.” 잊혀졌던 독립운동가가 21세기 도시 한복판에 재현되고 발달장애인이 스스로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일들이, 옷과 패션 무대를 통해 가능하다고 가영은 믿었다.

대학 진학 뒤에도 가영은 패션쇼를 더 배우고 싶어 했다. 캐나다 유학을 꿈꿨다. 방학마다 하루 12시간씩 아르바이트했다. 그렇게 세 번의 방학을 거쳐 모은 돈이 1400만원. “많은 것을 보고 싶어. 유학도 가고 싶고 여행도 다니고 싶어.” 가영이 입버릇처럼 가족에게 하던 말이다.

엄마는 휴대전화 너머 가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집안일을 하거나 산책하곤 했다. 일이 잘 안 풀리는 날은 ‘콜라 한잔하러 치킨집 가기’, 집에 늦게 들어오는 동생을 놀리는 ‘상황극 하기’ 등 모녀 사이에는 “둘만의 개그 코드”가 있었다.

함박눈이 내리던 2021년 겨울, 가영과 동생은 엄마 몰래 밤에 나가 사람 키만 한 눈사람을 만들었다. 엄마는 다음날 가영이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은 눈사람 사진을 보곤 “어디 한번 보자”며 현관문을 나섰다. 아침 햇살에 절반 가까이 녹아버린 눈사람. 가영과 동생, 엄마 셋이 깔깔대며 웃었다. “이게 뭐야, 너무 웃기게 생겼다.” 엄마에겐 잊지 못할 “겨울 선물”이었다.

가영의 엄마 최선미(49)씨는 한 달이 지났지만 ‘그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가영은 “친구가 이태원 근처에 사는데 함께 전시회를 보고 오겠다”고 했다. 10월30일 새벽 1시30분께, 엄마가 설핏 잠이 들었을 때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태원에서 큰 사고가 났어요.” 가영 친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그 친구한테 ‘왜?’ ‘얼마나 다쳤는데?’ 물으니 ‘사망’이라는 거예요. 얘가 너무 당황해서 잘 모르나보다, 내가 가야겠다 싶어서 아빠랑 옷도 제대로 못 챙겨입고 홍성에서 서울로 갔어요.”

엄마 아빠는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장례식장 너머로 구급차에 희생자들이 실려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병원은 아직 신원 파악이 안 됐다며 부모의 장례식장 출입을 막았다. “경찰이 아이 찾으면 연락 준대서 기다렸는데 연락이 없었어요. 결국 저희가 아이를 직접 찾아나섰다가 (동주민센터 같은 데서) 아이가 강동성심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갔죠.”

가영이 아니기를 바랐으나, 가영이었다. 엄마는 바로 딸을 데리고 집에 오고 싶었다. 하지만 각종 행정 절차가 엄마 아빠를 괴롭혔다. 검시 절차가 늦어져, 병원에서 다시 반나절 가까이 대기했다. 그 와중에 구청 공무원은 아빠에게 전화해 “장례비 지원되니 걱정 말라”고 했다. 경찰은 통화에서 쾌활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첫인사를 건넸다. 사건 조서를 쓰라는 안내 전화였다. “애기 아빠도 저도 너무 기가 막혀서, 도대체 이 사람들은 이 상황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싶더라고요.”

엄마는 지금도 그 구급차 안에
기다림 끝에 10월30일 오후 5시 가영을 홍성으로 데리고 내려오는 길. 엄마는 구급차 안에서 2시간 동안 딸의 얼굴을 쉼 없이 어루만졌다. “차가운 얼굴만 만지고 있었어요. 아이가 반응이 없더라고요. 그날 이후로 멈춘 거 같아요. 저는 지금도 그 구급차 안에 있어요.”

가영이 세상을 떠난 뒤 한 달 가까이 모든 만남을 끊었던 엄마는 지금 다시 사람들 앞에 섰다. 국가가 가벼이 여긴 죽음의 무게를 알리기 위해서다. “지금 분위기로는 우리 아이가 희생자가 아니라 사회를 우울하게 만들고 세금을 더 많이 나가게 한 가해자처럼 느껴져요. 대통령의 진심 어린 담화문 사과를 받고 싶고,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싶어요.”

가영의 엄마 아빠는 이태원 참사 유가족 협의체 준비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늦은 밤에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유가족들이 남긴 메시지가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 쌓여간다. 새벽 3~4시라도 누군가 메시지를 올리면, 거의 모든 사람이 읽는 데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빠르게 사라지는, 읽지 않음을 나타내는 ‘숫자’엔 매일 밤 잠들지 못하는 가영의 엄마 아빠도 포함돼 있다.

요즘 엄마는 가영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되뇐다. “엄마가 그날 용돈을 줘서 미안하고, 그곳에 엄마가 없어서 미안해. 엄마가 같이 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많은 꿈을 꾸었던 열아홉 살 가영은, 만 스무 살이 된 생일인 2022년 11월 1일 발인을 마치고 하늘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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