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성활동 구술영상

이경아

차의과학대학교 의생명과학과 교수

“30여 년의 난자 연구,
결국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었어요."

한국의 난임·불임 치료와 연구를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 여성.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연구자와 교수, 행정가이면서도 육아와 일로 고단했던 지난 시절을 가장 행복했던 때라 말하는 이경아를 만난다.

구술 내용 요약

생물선생님 대신 연구자의 길 선택, 미국 유학,
차의과학대학교 교수이자 여성의학연구소 연구자,
최우수논문상 수상, 생식의학총괄본부장, 일과 육아 병행

키워드

생식의학, 난임·불임 연구, 의생명과학, 성남, 차의과학대학교

생물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

30여 년을 난자 연구에 헌신해 온 이경아. 그는 1980년대 초 서울대에서 석사 과정을 시작하면서 연구자로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당시 국내에서는 난자 연구가 주목받는 분야가 아니었다. 불임과 난임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관련 연구가 활성화된 것은 한참 이후의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경아가 난자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대학교 석사 방에 들어가서 처음 만났던 세포가 저는 난자였어요. 현미경 밑에서 난자를 만났는데 정말 반짝반짝 빛나는 그 세포가 얼마나 이뻤는지. 난자가 너무 예뻐서 그때부터 그저 난자, 난자, 난자, 그러면서 왔고요.”

이경아의 부모는 그가 수학을 전공하리라 기대했다. 수학을 잘해 ‘미적분의 여왕’으로 불릴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이경아는 주위 사람들의 기대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했다. 생물을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중학교 때 좋아한 생물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이경아는 연세대학교 생물학과에 응시했다.

“생물을 좋아했습니다. 저는 당시 중학교 때 생물 선생님을 좋아했는데 생물을 공부하면 선생님이 될 수 있다, 이런 나름으로 앞날에 대한 계획이 보였기 때문에 롤 모델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생물(학)과에 (대학교 지원 원서를) 집어넣었던 것 같고요. 4학년 말에는 교생 실습을 나가죠. 제가 수업을 하는데 애들이 자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재미없는 선생이구나, 내가.’ 그때, ‘나는 티칭[teaching]에 자질이 없구나’라고 생각을 해서 내가 좋아하는 건 연구(라는 것을 알게 됐죠.)”

결국 이경아는 교사가 아닌 연구자의 길을 선택했다.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발생학 분야에 흥미를 느꼈다. 난자에 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다. 애초 생각했던 진로가 바뀌는 과정에서 불안함은 없었다. 이경아는 너무 먼 미래가 아닌, 지금의 관심과 일에 몰두했다. 주어진 삶의 과정에 충실해지자는 다짐을 지켜나갔다. 그 다짐이 그의 여정을 이끌었다.

“여러 수업을 듣다가 발생학이, 리프로덕션[reproduction·생식]이 재미있었고요. 유학도 그렇게 리프로덕티브 엔도크리놀로지[reproductive endocrinology·생식 내분비학] 하는 학교로 찾아왔었던 거고요. 유학이 유행이었어요. 스물일곱에 처음 집을 떠나봤죠. 그게 미국이었죠. 그 당시에 스물일곱이면 저희는 노처녀였거든요. 노처녀가 유학 가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학위 따고 잡[job]까지 얻어서 금의환향했기 때문에 성공한 인생이었죠.”

스물일곱에 시작한 미국 유학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유학 중 결혼했고, 아이가 생겼다. 이경아는 학업과 육아를 병행하는 고단한 일상을 남편의 지원과 지도교수의 배려로 견뎌냈다. 박사 과정을 마무리하며 진로를 고민하던 중, 또 한 번 그의 삶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만났다.

“그리고 미국 가서 학위를 마치고 들어올 때 대학을 간 게 아니고 여성의학연구소, 차병원으로 들어온 이유가 92년 7월에 여성의학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난임센터가 발족을 했어요. 그때 미국에서 공부한 생식생리학자를 찾는다, 여기서는 사람을 찾고 있었고 저는 학위를 마치고 있었고, 그래서 딱 맞게 인터뷰(면접)도 없이 거의 걸어 들어왔거든요.”

국제적인 난자 연구자로 인정받다

이경아는 ‘난자 안에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난자에 몰입했다. 그 스스로 난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표현할 만큼 연구는 매력적이었다. 난자 연구를 하던 중 어릴 적 품었던 ‘교사’의 꿈도 이뤄졌다. 1997년 개교한 포천중문의과대학교(현 차의과대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그의 연구는 제자들과 협력하면서 큰 힘을 받았다. 그의 이런 관심과 몰입이 난임 및 불임 치료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로 피어났다.

“저희 차병원 여성의학연구소의 임신율이 우리나라 최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 분이 와서 한 번 아기를 낳는 데까지 돌아가는 걸 한 사이클[cycle]이라 하는데요. 저희가 차병원에서 핸들링[handling]하고 있는 사이클 수도 세계적인 숫자이고요. 그다음에 저희(에게) 오시는 분 중에 임신율도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자부합니다. 제가 차병원이라는 이 여성의학에 집중되어 있는 병원 난임센터를 중심으로 한 연구소에서 연구를 하는 교수가 됐다는 것이, 아마 제게 가장 메리트(여성의학, 난임 및 불임 연구에 집중하는 조직에 속해 있는 것)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하고 있고요.”

이경아가 이끄는 연구팀의 성과는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았다. 2004년 미국 불임학회에서 ‘난소 내 초기 난포 발달에 관여하는 유전자 목록’ 관련 연구로 최우수논문상을 받았다. 2016년에는 환태평양 생식의학회에서 수상했다. 난자 연구는 어렵다. 줄기세포 등 상대적으로 쉽게 배양이 가능한 세포 연구에 비해, 난자는 실험할 수 있는 세포를 충분하게 확보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조건에서 이루어낸 성과이기에 그 가치가 빛났다.

“커피를 마시다가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그래서 우리 연구원 불러가지고 이렇게 이렇게 한번 실험해 볼까 해서, 또 그 친구가 또 손재주가 좋아가지고 금방 그 연구를 해냈는데 그게 저기 세계학회에서 1등 먹었다고 연락이 온 거예요. 동물 한 마리를 희생시켜도 한 10개, 20개의 난자밖에 안 나오는데 그런 일 하기 힘든 샘플 가지고 아주 최신의 분자생물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유전자 연구를 했다, 그래서 남들이 인정해 주는 것 같습니다.”

연구자, 교수에서 행정가라는 또 다른 역할이 이경아를 맞았다. 2012년 차의과대학교 생명과학대학 초대 학장을 거쳐 2018년 차병원 그룹의 생식의학총괄본부 본부장을 맡았다. 행정가로 일하는 것은 이경아에게 커다란 도전이자 자신이 미처 알지 못한 역량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이경아는 매니지먼트[management]라는 생소한 분야의 책들을 읽고 배우며 자신의 역할을 성찰하고 조직을 다듬어나갔다.

“연구실에서 기초의학만 하던 교수가 여성의학연구소 연구원들을 총괄하는 행정 본부장이 된다는 일은 지금 한 6년, 7년째 되어 오는데 돌아보면 연구를 하는 일도 그렇고 본부장의 역할도 그렇고 세상 살아가는 일이 사람 간의 일인 것 같아요. 관계를 정립하면서 일도 잘되게 하고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이 어떻게 보면 ‘좀 더 보람 있고 행복한가?’. 또 내 안에 그런 역할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도 저 스스로도 발견할 수 있었고요. 그래서 앞으로 인생에서 제게 어떤 챌린지[challenge]가 왔을 때 한번 해볼까, 이런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아요.”

육아와 일을 병행했던 시절, 가장 행복했던 때

삶의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살아온 이경아에게 다시 돌아가고 인생의 시기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던 때다. 그는 ‘워킹맘’으로 살아온 과거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엄마, 아내, 연구자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야 했던 그때야말로 가장 열정 넘치고, 자신에게 충실했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이경아에게 일, 육아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 이렇게 물으면, 아이 낳고 차병원에 들어와서 연구 시작하고 이런 내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이들 막 키우면서 잠도 잘 수없이 바빴던 시절이 저는 제일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기예요. 내 일과 엄마의 일, 아내의 일을 병행할 수 있는 에너지, 열정, 인내, 그것이 내가 나를 칭찬해 줘야 하는 대목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병행을 했던 걸 정말 잘했다 지금도 생각하고 있고요. 왜냐하면 저희 둘째 딸이 늘 엄마를 자랑스러워하거든요.”

이경아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 다른 여성들, 젊은이들이 용기를 가지기를 바랐다. 여전히 여성들이 육아와 가사에서 더 많은 짐을 지면서 사회생활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주저앉지 말라고, 용기를 가지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저출생의 문제를 여성의 몫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일하는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고, 임신·출산·육아의 고충과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다음에 아기를 낳고도 얼마든지 직장생활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용기를 갖고 그렇게 하라고 하고 싶었고요. 사회에 있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난임을 아이비에프[ivf·체외수정]로 해결할 일도 아니고요. 저는 이 저출산은 전체적인 사회가 아기를 같이 키워주는 분위기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