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성활동 구술영상

이레샤 페레라

이주여성 자조모임 톡투미 대표

“결혼이주여성들의 이야기에
더 많이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스리랑카 출신으로 한국에 정착해 이주여성들의 자립과 권리 향상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여성. 톡투미를 설립해 이주여성들의 커뮤니티를 지원하고, 한국 사회의 다문화 인식 개선에 발자취를 남긴 이레샤 페레라를 만난다.

구술 내용 요약

스리랑카 출생, 의류 회사, 한국 정착, 방송 활동,
이주여성 자조모임 톡투미 설립, 모니카 인형,
결혼이주여성 최초 주민자치위원, 이름 13글자 주민등록 등재

키워드

결혼이주여성, 이주여성 자립, 톡투미, 안양, 모니카, 다밥협동조합,
여성 인권

스리랑카에서 한국에 정착하기까지

결혼이주여성의 삶은 단순한 문화적 적응을 넘어선 도전이었다. 특히 자녀를 낳고 키우면서 마주하는 현실의 벽은 더욱 높았다. 이레샤 페레라. 제21회 ‘미래를 이끌어갈 여성지도자상’ 수상자로 선정된 그는 자녀와 함께 겪은 차별과 편견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다.

“결혼 이민자는 또 이제 더 넓게 볼 수 있는 사회로 열리게 되잖아요. 제 아이가 생기고 그때부터 생기는 문제점은 또 다르더라고요.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답이 없는 것 같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레샤 페레라는 스리랑카에서 1975년 네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자동차 바퀴 제조회사에서 38년간 일했고, 네 자매를 키우는 과정에서 이레샤는 가장 아들 같은 딸이었다. 스리시왈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칼레니 예술대학 디자인과에 진학했으나, 비용 문제로 1년 반 만에 사우디아라비아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 의류 회사에서 알바생으로 시작해 7~8개월 만에 디자인 부서의 중심 역할을 맡게 되었고, 이후 싱가포르, 미국, 인도 등을 오갔다.

“칼루타라라는 마을에서 태어났고요. 망고스틴이 가장 많이 나오는 마을이기도 해요. 그리고 둘째로 태어났고요. 대학교 디자인과에서 1년 반 공부하다가, (의류) 회사가 이제 생겨서 회사 통해서 다양한 나라에 다니게 됐었거든요. 싱가포르도 갔고 미국도 잠깐 갔었고 인도도 있었고. 공부보다는 일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해요. 친정에는 나를 포함해서 딸만 넷이거든요. 아빠가 혼자 딸만 넷이 키우는 게 쉽지는 않잖아요.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고. 그런데 (유학을) 가자마자 다행히 기회도 생겼고 조금 열심히 했었죠.”

이레샤 페레라의 한국행은 우연한 기회였다. 스리랑카로 귀국 후 회사로부터 싱가포르, 한국, 태국 중 한 곳을 선택하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그는 처음에는 싱가포르를 선택했다. 하지만 한국 발령이 예정되었던 직원의 개인 사정으로 대신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회사가 제공한 월세방은 현재 시어머니의 집이었고, 그렇게 한국 생활이 시작되었다. 첫 방문 때는 한국의 조용하고 굳어있는 듯한 분위기가 낯설어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두 번째 방문에서도 같은 방에 머물게 되었고, 그곳에서 시어머니의 소개로 현재의 남편을 만나 안양에 정착했다.

“인연이 여기였었나 봐요. 회사에서 얻어줬었던 방이 우리 시어머니 집이었어요. 그래서 거기 월세로 살았다가 집주인 되는 거지, 뭐. 어머니 소개로 이제 남편을 만나게 되었고. 제가 싹싹해서 되게 좋았었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때 와서부터 지금까지 안양에 살고 있고요. 지금 이제 아들, 딸. 큰 애는 얼마 전에 군대 갔다 왔고 둘째는 이제 내년에 대학생. 다 키웠습니다.”

이주 여성의 아픔과 고통을 직면하다

2006년, 대사관의 소개로 KBS '러브인아시아' 고정 패널이 된 이레샤 페레라는 14년 동안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베트남이나 필리핀에 비해 스리랑카가 덜 알려져 있었다. 매주 방송을 통해 다른 결혼이주여성 가족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겪는 어려움이 자신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리포터로서 현장을 방문하며 만난 이주여성들의 소통 부재와 고립감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거의 이제 14년 동안 나와 같은 처지의 가족을 매주 만나게 되었어요. 그 가족이 갖고 있었던 문제점들이 나랑 똑같더라고요. ‘계속 어려운 점만 얘기하고 있을 게 아니라 방법을 같이 찾으면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톡투미’라는 모임을 만들게 됐어요.”

2010년, 이레샤 페레라는 방송 활동으로 모은 수입으로 작은 사무실을 열어 이주여성들의 활동 공간을 마련했다. ‘톡투미(Talk To Me)’라는 이름에는 대화를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처음에는 이주민들의 단체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서울시에 비영리단체로 등록하며 공식적인 첫걸음을 내디뎠다. 현재는 전국 500여 가구, 약 1,000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는 대규모 커뮤니티로 성장했다.

“톡투미라는 말이 영어로는 이제 ‘대화하자’는 거잖아요. ‘나에게 말을 걸어주세요’라는 거잖아요. 내 목소리를 내가 내지 않으면 나의 아픔을 누가 알아요? ‘스스로 해야 할 것을 찾자’는 생각을 갖게 돼서 비영리단체로 등록했고요. 방송국에서 벌었던 비용을 다 모아서 사무실을 열어서 이주여성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죠.”

“우리 회원들로 따지면 한 천 명 가까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결혼 이민자들이 다양한 실력들을 갖고 있거든요. ‘아, 오늘도 과잣값이라도 벌었다’, ‘톡투미 때문에 내가 나가서 발표할 수 있었다.’ 자신감도 얻어서 생활에서도 조금 만족스러운 감도 있고. 이런 다양한 말들이 나와요. 저는 우리가 119가 아니지만, 우리 이민자들에게 119처럼 당신들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어떤 문제도 빠르게 해결되지는 않지만 조금 귀를 열어서 들어주는 기회가 많이 있어야 된다고 봐요.”

결혼이주여성들은 한국에서 자신의 재능을 개발할 기회를 찾기 어려웠다. 김치 만들기나 한글 배우기 같은 프로그램은 많았지만, 그들이 원래 가진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는 제한적이었다. 이레샤 페레라는 각 나라의 전통 음식을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개발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다밥사회적협동조합을 만들고, 현재 18~19개의 음식을 밀키트로 개발하여 판매하고 있다.

“결혼이주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계발하는 기회가 많지 않더라고요. 태어나서부터 먹었던 음식을 한국에 들어와서도 자기가 만들 줄 알잖아요. 유명한 곳에 가면 (외국 음식을) 되게 비싸게 판매하고 있고. 각 국가의 대표적인, 한국(인)의 입에 맞는 음식을 지금 개발해서 한 19개 (밀키트) 패키지 정도 판매를 하고 있고요.”

톡투미는 2012년부터 ‘모니카’ 인형을 활용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모니카’라는 이름은 ‘멀리서 왔으니까’라는 말에서 착안했다. 어르신들이 ‘멀리서 왔으니께’라고 하던 말이 모니카가 된 것이다. 전 세계의 다양한 피부색과 생김새를 반영한 수천 개의 인형을 제작했다. 모니카 인형은 단순한 장난감이 아닌, 사람은 태어날 때 자신의 모습을 선택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교육 도구가 되었다.

“멀리서 오니까 ‘모니카, 모니카’예요. ‘멀리 왔다’라는 그 말이 되게 마음속에 있었거든요. 되게 다양한 피부색, 생김새 이렇게 가지고 태어난 친구죠. 사람이 태어날 때 내가 원하는 대로 태어날 수 없다는 뜻을 모니카 통해서 담고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 검은색 인형도 되게 인기가 있고요. ‘네가 이거 가지고 활동해야 된다’라고 이제 아이들한테도 요청하면은 받아들이더라고요. 그래서 모니카가 굉장히 큰 역할을 톡투미에서 하고 있죠.”

‘다문화 사회’는 있지만 ‘다문화 사람’은 없다

이레샤 페레라가 안양시 안양2동 주민자치위원에 도전한 것은 20년 넘게 살아도 ‘안양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도전이었다. 처음에는 ‘주민자치’가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지역 문제에 관심을 두고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점차 ‘외국인’이 아닌 ‘이레샤 위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2014년부터 4년간 활동하며 결혼이주여성 최초의 주민자치위원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는 지역 구성원으로서 목소리를 내고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의미 있는 사례가 되었다.

“‘주민 자치 활동가들’ 뭐 이렇게 쓰여있었어요. 지나가는 분이 있어서 ‘자치 활동이 뭐예요?’라고 했더니 동네에서 필요한 활동을 같이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할게요’라고 했더니 웃더라고요. 그리고 (주민자치회에) 쉽게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자신감이 있고 할 수 있다’, ‘저도 기회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이제 받아들이더라고요.”

“가서 앉아있으면 처음에는 사람들이 저에게 한마디도 걸지 않았어요. 근데 (동네) 문제점을 놓고 해결하려고 대화하다 보면 (제 이야기에) 공감하더라고요. 그때는 이제 외국인이 아니라 동네 사람으로 시선이 바뀌게 되는 거죠. 자기가 있는 곳을 자기 위치로 바라보고 활동한다, 아니면 살아간다 하면 언제든지 자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이레샤 페레라는 ‘다문화’라는 단어 사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사회는 다문화일 수 있지만 개인을 다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 태어난 2세를 ‘다문화 아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13글자 전체 이름을 주민등록에 기재하기 위해 6년간 노력했고, 이를 통해 현재는 26글자까지 등록이 가능하도록 제도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사회가 다문화가 맞지만 사람은 다문화가 될 수 없다는 얘기가 맞는 거거든요. (모두) 다양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 사람한테 우리가 다문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이렇게도 물어봐요. ‘그러면 너희들을 뭐라고 불러요?’ 내 이름 있잖아요. 그냥 이레샤로 찾아주면 좋겠다. 외국 사람, 스리랑카에서 왔던 누구 이거 아니라 동네 사는 같은 사람으로, 이제 이름으로... 6년 싸워서 열세 글자가 들어가 있습니다. 네, 하나도 빠짐없이. 지금은 스물여섯 글자까지 등록이 됩니다. 앞으로 더 긴 이름들이 나타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