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실천적 예술가로 한국 현대미술의 변화를 이끈 작가. 40년간 미술계에서 여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작품 활동을 해온 정정엽을 만난다.
미술계에 대한 문제의식, 이화여자대학교 진학, 두렁, 여성미술연구회,
노동 현장, 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트, 주변과 생명, 제주 4·3,
안성 미리내마을
미술, 실천적 예술가, 미술 행동가, 미술 연대, 여성주의, 안성, 지역성,
고암미술상, 이중섭미술상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국 미술계에서 여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작품 활동을 해온 정정엽. 1984년 '두렁' 가입을 시작으로, 1986년 '여성미술연구회' 결성에 참여하는 등 1980년대 한국 미술계의 주요 변화를 이끈 그는 현재까지도 안성 미리내마을 작업실에서 하루 8시간 이상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전라남도 강진에서 태어나 서울 답십리에서 자란 소녀는 어떻게 한국 현대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을까. 스스로를 ‘시민작가’라고 칭하는 그의 이야기는 한국 여성 미술가의 역사이자, 동시대 예술가의 사회적 실천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치열한 문제의식을 품고 있던 정정엽은 여성 작가의 부재와 미술계의 획일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작품 속 여성이 누드나 ‘독서하는 여인’으로만 표현되는 현실을 지적하며,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의도적으로 이화여자대학교에 진학했다. 일주일에 10곳 이상의 전시를 찾아다니며 1,000장이 넘는 전시회 팸플릿을 모으며 미술계의 현실을 직시했던 그는, 특정 학교 출신이 주도하는 미술계의 폐쇄성에도 주목했다.
“반 진담으로 ‘여대를 개혁하려고 갔다’. 제가 고등학교 때 일주일에 한 열 군데 정도씩 전시를 돌아본 경험이 있어요. 그 당시 미술계를 많이 들여다보면서 ‘이상하다’ 몇몇 학교가 독점하고 있고 활동하는 거의 90% 이상이 남성이고. 특히 그 미술 속의 여성. 누드 아니면 독서하는 여자 이상의 캐릭터가 없는 거예요. 대상화된 여성이죠.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과 연대해서 뭔가를, 일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여성의 지위는 회복될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일부러 (여대를) 간 것도 있죠.”
1984년, 정정엽은 '두렁' 창립예행전을 통해 삶과 미술의 괴리를 질문하는 새로운 미술운동을 접하게 된다. 처음에는 판화 작업을 돕는 등 학생으로 참여하다가 졸업 후 정식 회원이 된 그는 민주화운동 시기 집회에 필요했던 걸개그림을 제작하며 미술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했다. '두렁'은 단순한 미술 집단을 넘어 민요연구회, 탈춤반 등 다양한 문제의식을 가진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토론하고 실천하는 공간이었다.
“대학교 3학년 때 학교 앞에 전단지가 뿌려져 있었어요. 그게 1983년 두렁 창립예행전이에요. 애오개소극장에서 창립예행전을 한다는 전단지였어요. 제가 주워 들고 이렇게 보면서 ‘오늘의 미술은 무엇을 말하는가’, ‘왜 삶과 이렇게 괴리되어 있는가’. 이렇게 미술 바깥에서 미술 안에 질문을 한 최초의 집단인 것 같았어요. 저한테는 그런 질문이. 그래서 찾아갔죠. 그때는 이제 학생은 뭐 도와주러. 판화 찍으면 판화 같이 찍고 그러다가 작가여야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이제 졸업하고 들어가게 된 거죠. 그 시대가 만들어낸 형식이죠.”
1985년, 정정엽은 혜화동 '그림터 화실'에서 구로동 파업 현장을 위한 걸개그림을 그리던 중 경찰의 검문을 받게 된다. 곤봉으로 노동자를 탄압하는 장면과 '노동 탄압 중지하라'는 구호가 담긴 작품을 본 경찰들은 작품을 압수했다. 이는 한국 미술사상 최초로 작품이 공권력의 탄압을 받은 사건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 민족미술협의회 설립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구로동의 파업 현장에 이제 걸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걸기 전에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에 출품할 예정이었어요. 노동자 탄압하는 그림이니까 이렇게 곤봉 들고 노동자를 이렇게 때리는 동작을 하고 뒤에는 ‘노동 탄압 중지하라’ 이렇게 구호가 쓰여있었는데… 경찰은 태어나서 그런 그림을 처음 본 거예요. 너무 충격을 받아가지고 우리는 붙들려가게 됐죠. 그러고 나서 ‘힘전’에 경찰이 난입을 해서 그림 다 가져간 거죠. 우리나라 미술사에 처음으로 탄압을 받기 시작한 시점이 그 힘전으로부터 시작됐어요. 그 이후로 민족미술협의회를 12월에 만들게 되죠.”
1986년부터 1994년까지 경인지역 공단에서의 활동을 목판화로 기록한 정정엽은 자신의 경험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바쁜 활동 속에서도 매년 2~3점의 작품을 통해 노동현장의 일상과 투쟁을 담아냈다. 총 17점의 목판화 연작에는 노동 현장의 다양한 순간들이 기록되어 있다. 또 1986년 여성미술연구회를 결성을 계기로 동료 여성 작가들과 조우하며 그의 작품 세계는 또 다른 지평으로 이어졌다.
“실제 공장에서 취직하고, 나와서 노동자 지원활동하고 이럴 때는 회화 작품을 하기에 시간이 모자랐죠. 그런데 이제 목판화 같은 경우는 제작 시간이 짧고, 그래서 1년에 서너 점씩 목판화를 하게 되는데 그 작품만 봐도 ‘아, 이 사람 저 공단에 취직했나 보네’, ‘잔업 없는 날 좋았나 보네?’ 그냥 살아온 내력이 하나씩 그냥 기록된, 그런 작품으로 남았어요.”
“이화여대 졸업생 6명과 시작했는데, 지금 여기서 우리의 얘기를 하자라는 얘기로 출발했고. 10월모임전이라고 여성 선배들이 만든 그룹이 있었어요. 작품이 좋다는 소리를 듣고 그분들을 만났어요. 그러니까 20대 후반의 여자와 40대 초반의 여성들이 만난 거죠. 1년간 스터디를 하면서 만남을 지속하다가 여성미술연구회를 만들게 됐죠.”
2000년, 여성 작가들과 다시 만난 정정엽은 '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아름답고 방자한 자궁'의 줄임말인 '아방궁'이라는 이름으로, 종묘 거리에 20개의 분홍빛 치마를 걸어 퍼포먼스를 시도했다. 전주 이씨 종친회의 반발로 무산되었지만, 이후 그 쓰개치마는 위안부 수요집회 1,000회차 집회와 탈핵 시위 등 다양한 사회운동의 현장에서 상징적인 저항의 도구가 되었다.
“어느 날, (여성 동료들) 몇 명이 만났는데 다 고립되어 있는 거예요. 애 낳고 결혼하고 네트워크가 다 끊어진 거예요. 그래서 자기 경험들을 나누고, 또 누가 괴로워하면 같이 술도 마셔주고. 뭐 이렇게 하다가 서울시에서 미술 축제를 공모를 하게 됐어요, ‘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트’. … 종묘 앞 공원을 축제 장소로 잡고 분홍치마를 만들어서 스무 개를 종묘 들어가는 거리에 쫙 걸은 거예요. 치마가 휘날리는 거죠. 그래서 했는데 전주 이씨 종친회가 오픈하는 날 치마 뜯고 뭐 행사가 무산됐죠. 그냥 우리를 그냥 내버려뒀으면 그냥 우리끼리 놀다가 끝났을 텐데 괜히 그거를 못 하게 해가지고 뭐 재판도 하고 이제 좀 조용히 살려고 했는데 다시 전면에 나오게 된 거죠.”
콩, 팥, 나물, 사군자 등 일상적 소재를 통해 여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작업을 이어온 정정엽은 페미니즘이 균형 잡힌 시각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작품에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그려진 콩과 팥은 단순한 식재료가 아닌 생명의 씨앗으로 존재한다. 2006년부터는 멸종 위기 동물들을 그리는 등 소외된 생명에 대한 관심을 예술로 표현하고 있다.
“지금까지 보지 않았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 팥이나 콩 같은 경우도 제가 낱낱이 하나씩 다 그리잖아요. 그거는 하나의 씨앗이고 그리고 그 아름다움도 살림을 하는 여성이어서 포착할 수 있었던 그런 소재였고. 그러니까 페미니즘은 균형 잡힌 시각을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가 노력을 하는 거죠. 우리가 수만 년 동안 남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봤잖아요. 그 기울어진 시각에서 (그동안) 보지 않았던 시선. 그걸로 봐야만 균형이 잡히니까 그런 노력을 하다 보니 약자라든지 되돌아보지 않은 것들 이런 것들이 저절로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아요.”
또 최근 정정엽은 제주 4.3 사건의 생존자들을 단순한 피해자가 아닌 독립된 존재로 바라보고 표현하는 작업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그는 역사적 사건의 당사자들을 현재를 살아가는 주체적 존재로 그려내며 기존의 피해자 중심 서사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다.
“4.3에 살아남은 할머니들인데, 그 할머니들을 피해자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 자신을 하나의 존재로 이렇게 느끼고 있는 할머니들이고. 또 그렇게 (작품에 표현)해드리고 싶고.”
현재 안성 작업실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정정엽은 중앙이 아닌 지역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공유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발 딛고 있는 곳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그의 예술적 신념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018년 고암미술상, 2020년 양성평등문화상, 2022년 이중섭미술상 수상 등을 통해 그의 예술세계는 계속해서 인정받고 있다.
“지금 안성 (미리내마을) 작업실에 있잖아요. 중앙이 아닌 저의 시선도 아까 보이지 않는 존재들 그런 생명들에 갔듯이 중앙을 지향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지금 내가 딛고 있는 곳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었던 그런 게 저한테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작업들로 연결이 됐고 지금 안성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자기가 발딛고 있는 곳의 이야기를 더 많이 생산하고 공유하고 부딪혔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