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성활동 구술영상

김다미

군포여성민우회 대표

“더 나은 복지를 위해
사회 전체가 관심을 두고
지원해야 해요.”

경제적 어려움과 가부장적 환경 속에서 성장해 여성인권의 필요성을 몸소 깨달은 여성 활동가. 20대에 여성운동을 시작해 40대에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청소년부터 노인까지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해 온 군포여성민우회의 김다미를 만난다.

구술 내용 요약

장녀로서의 책임감, 기독여민회 여성운동, 사회복지 공부,
노인복지관 상담·프로그램, 군포여성민우회 활동, 한부모가족 사업

키워드

여성인권, 여성운동, 사회복지, 노인, 사회적 약자, 한부모가족,
여성친화도시

여섯 자매 중 장녀, 책임감으로 물든 어린 시절

김다미의 성장 과정은 차별과 관습에 짓눌려 신음했던 대한민국 여성들의 서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1962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여섯 자매 중 첫째로 태어난 김다미의 어린 시절은 경제적 어려움과 장녀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으로 채워졌다. 남자아이를 원하는 가족의 바람 때문에 여섯 딸이 태어났다. 성평등을 비롯한 여성인권에 대한 그녀의 관심과 헌신은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와 문화에서 비롯한 불평등 경험에서 시작됐다.

“여성단체에서 인권운동을 하고 그다음에 사회복지 분야에서 사회복지 실천 활동을 하고, 제 마음이 특별해서는 아닌 것 같아요. 제 삶이 바로 여성인권운동이 필요한 삶이었고 또 제가 사실은 사회적 약자였어요.”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웠어요. 저는 여섯 자매의 장녀예요. 동생들을 보살피고 돌보고 또 이렇게 먼저 배려하고 이런 마음은 좀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김다미가 여성인권에 눈을 뜬 것은 20대 초반, 기독여민회를 통해서였다. 기독여민회 활동 중 1987년 6월 항쟁의 현장에 서기도 했던 그는 가부장적 가족 문화를 바꾸는 일에 간사의 역할을 맡아 매진했다. 또 탁아방 운영 등 여성들의 실제적인 고민을 해결하는 일에 관여했다. 김다미의 실천은 교육학과 사회복지에 관한 공부로 이어졌다. 그는 40대에 들어서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이어 가톨릭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 과정에 진학했다. 아내와 어머니, 활동가의 삶을 살던 김다미에게 40대의 뒤늦은 학업은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직장생활 하는 가운데 제가 20대 중반에 이제 여성단체를 처음 알았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제 삶에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게 기독교여민회와의 만남이었어요. 여성단체에 있으면서 정말 우리 여성들이 배우고 스스로 자기 삶을 가꿔 나갈 수 있는 그런 방법을 생각하다가 교육학을 하게 되었고요.”

“2000년에 스웨덴의 사회복지 현장을 보름 정도 다녀온 계기가 있어요. 그 사회복지에 아주 다양한 무슨 아동 정신과적 분야, 폭력 피해 여성들이 있는 곳, 이런 것들을 다 둘러보고 설명을 듣고, 푸드뱅크도 직접 가보고 우리가 직접 봉사도 한번 해보고 이러는 과정에서 많이 그런 동기(부여)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 이후에 사회복지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어요.”

여성인권운동에서 사회복지로

김다미가 가족과 사회에서 목격한 불평등은 그녀를 기독여민회로 이끌었고,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게 했다. 이후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실질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자 사회복지에 뛰어들었다. 그에게 사회적 약자는 단일한 집단이 아니라 각기 다른 고유의 어려움을 가진 개인들이다. 특히 청소년, 그중에서도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은 여전히 낙인과 기회의 결핍 속에서 성장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군포여성민우회에서 이러한 가정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또 김다미는 ‘경기중부비정규직센터’에서 임금 불평등, 고용 불안, 그리고 기본적인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김다미에게 가장 깊은 흔적을 남긴 것은 광명시 노인종합복지관에서의 10년이었다. 그가 복지관에서 상담 일을 시작했을 때, 그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를 접했다.

“청소년문화의집에서 그 방과 후 아카데미도 했다든가 또 한부모가족지원센터에서 또 일을 했다든가 뭐 이렇게 좀 과정이 있고. 맨 마지막이 노인복지관이 제가 이제 노인복지관에(서) 상담을 한 것은 50대 초에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이제 사회복지 현장에 있고 또 노인복지관에서 오래 있으면서는 노인분들하고 만나기 위해서는 심리상담사도 공부를 하면 좋겠다, 심리 상담 공부를 좀 하면 노인분들의 심리도 좀 이해할 수 있겠다, 노인들하고 즐겁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할 수 있는 놀이 치료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들이 자꾸 드는 거예요. 같이 만나고 했을 때 굉장히 노인분들이 편안하게 대해주셨어요. 저를 또 편안해하시고 저도 노인들하고 이야기하고 프로그램 진행하고 하면 재미있어하시고 이런 모습들이 되게 저도 뿌듯하고 보람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중 하나는 글을 배우고 싶어 했던 80대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그분은 평생 자신의 이름을 쓸 줄 모른다는 사실을 숨기며 살아오셨다’고 김다미는 말했다. 김다미는 ‘새로 사귄 남자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고 싶다’는 이야기를 듣고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김다미는 그 여성이 자신감을 얻는 모습을 보는 것이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보람 있는 경험 중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한부모가족 지원에서 여성친화도시까지

인구 26만의 작은 도시인 경기도 군포에서 1999년 창립된 군포여성민우회는 돌봄, 여성 인권 옹호 등의 활동을 펼쳐왔다. 초기 회원 중 한 명인 김다미는 미혼모를 위한 안전한 공간, 교육, 성평등 캠페인 같은 풀뿌리 활동에 참여했다. 자조 모임, 법률 지원, 옹호 활동을 통해 즉각적인 필요를 해결했을 뿐 아니라, 더 넓은 제도적 변화를 촉진했다.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보았다. 다른 단체들과 협력하여 한부모가정을 지원하는 국가 정책이 만들어지는 데 기여했다. 군포에서 심어진 씨앗은 전국적인 네트워크로 성장했고, 결국 한국한부모연합 창립으로 이어졌다.

“군포는 사실은 되게 작은 도시거든요. 이렇게 활동하기가 되게 재미있고, 어떤 위원회에 소속되어서 활동도 해봤고, 저는 군포여성민우회는 창립할 때부터 회원이 되었거든요. 정부에서 하지 않는 그런 활동들이 그러나 여성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활동들이 무엇인가를 되게 고민해서 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한부모가족 지원하는 사업을 되게 많이 했었어요. 자조 모임뿐만이 아니라 복지와 연계 물품 연계, 지지하고 응원하는 그런 활동들이 이제 한국한부모연합을 태동시키는 그런 또 계기가 되기도 했고. 지금은 어린이집을 다 국가에서 운영하잖아요. 그 당시에는 없었어요. 탁아소를 만들었어요. 또 지금은 지역아동센터라는 곳을 운영하잖아요. 그때는 없었고 공부방이라는 것을 했었어요.”

2024년 군포여성민우회 대표로 선출된 김다미는 지역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꿈꾼다. 창립 회원으로 시작해 20여 년간 이어온 그의 활동은 이제 ‘여성친화도시 군포 만들기’라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김 대표가 그리는 여성친화도시의 모습은 명확하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되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며, 평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도시다. 이를 위해 그는 지자체와의 적극적인 협력을 강조한다. 특히 최근에는 딥페이크 등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성폭력에 대응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군포여성민우회가 운영하는 성폭력상담소를 통해 피해자 지원에 나서는 한편, 예방을 위한 정책 마련도 촉구하고 있다.

“지금도 끊임없이 어떤 사업을 해야 할지 이런 것들은 고민하고 있어요. 민관이 같이 협력해서 이 군포시를 여성, 여성들이 살기 좋은 도시, 우리 여성들이 정말 평등한 도시로 만들기 위해서 의견도 내고 그것이 정책으로 채택되고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차별받지 않는다고, 차별이 없는 건 아닙니다."

김다미는 사회복지를 ‘개인’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을 경계했다. 사회복지는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복지와 관련 영역에서 일하는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회복지는 더 이상 ‘봉사’나 ‘착한 일’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복지사들은 전문가로서 정당한 처우를 받아야 하며, 적절한 근무 환경이 보장되어야 한다. 특히 요양보호사 한 명이 과도하게 많은 노인을 돌보는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분들의 인식에서 사회복지는 좋은 일하는 사람들 봉사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사실은 봉사 그 분야에 어떤 공부하고, 전문가이시거든요. 그 사람들에 대한 처우도 정당하게 해줘야 된다고 생각하고요. 그 안에서도 또 차별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들이 좀 필요할 것 같고. 물론 이 삶에서 나 개인의 마음 자세, 나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고요.”

“그런데 이 사회가 그렇게 하도록 하는 시스템이 되어야 되는 거죠. 예산도 거기에 투여가 돼야 하고, 교육 프로그램도 있어야 하고, 상담 프로그램도 있어야 하고. 이런 것들이 있어야 변화가 되는 것이지, 한 사람 한 사람이 당신이 변해야 된다 이렇게 요구만 해서 변할 일은 아닌 것 같거든요. 내가 내 삶에서 차별받지 않는다고 해서 이 사회가 차별 없는 사회 아니거든요.”

여성의 인권이 많이 신장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김다미는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며, 어린 시절에는 차별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이 사실은 명백한 차별이었다고 말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따로 상을 받았고, 여성들은 별도로 식사해야 했다. 이런 일상적 차별이 당시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워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개인의 경험을 넘어 더 넓은 시야로 사회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데이트 폭력, 디지털 성범죄 등 여성을 향한 폭력은 계속되고 있으며, 여성 관련 예산과 전담 부서는 오히려 축소되는 추세다.
김다미는 훗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냐는 질문에 “열심히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또 정말 이 사회와 여성의 평등한 사회를 위해서 노력했다 하는, 그렇게 스스로 생각이 되고, 그렇게 기억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김다미는 젊은 여성들에게 차별받고 있는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들에게 더 관심을 둘 것을 당부했다.

“차별당하지 않고 살았더라도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살펴본다면은 차별당하는 여성, 취약한 우리 장애인, 또 차별당하는 노인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연대하고 함께 손을 잡고 그런 것들을, 좀 더 차별이 없는 사회로 만들어가기 위한 그런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좀 듭니다.”

또 김다미는 여성들에게 도전하고, 배우고, 참여하라고 조언한다.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요구되던 ‘얌전하고 소극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새로운 도전을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김다미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