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군 백학면은 ‘2022년 경기도 문화특화지역 조성 공모 사업’에 선정된 DMZ문화마을이다.
총괄 기획자인 김재원 예술감독을 만나 마을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바람이 제법 쌀쌀해진 지난해 11월, 백학면 DMZ백학문화활용소에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
심금을 울리는 옛날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을 관람한 것. “부지깽이도 덤벙인다”는 가을걷이를 끝낸 마을 주민들은 모처럼
편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며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1968년에 개봉한 영화인데, 지금 봐도 재밌네요. 왜 대히트
했는지 알겠어요. 어르신들이 울다가 웃다가 감탄하시는 모습을 보니 뿌듯합니다.”
문화특화지역 조성 사업 일환으로, 한국영상자료원의 ‘찾아 가는 영화관’과 협업해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김재원 예술감독은 “외진 곳이라 어르신들은 영화 관람하기가 쉽지 않죠.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마련한 따뜻하고 소중한 자리였는데, 다들 즐거워하시니 보람이 큽니다”라며 모두가 함께 즐긴 문화생활이었다고 밝혔다.
Q 문화특화지역 조성 사업이 무엇인가요?
특색 있는 문화 자원으로 지역을 활성화해 지역 내 문화 불균형을 해소 하기 위한 사업입니다. 예술·역사·전통·문화 등 지역의 자산을 고유의 브랜드로 키워 관광산업,
문화 창업을 이끄는 역할도 기대하고 있지요.
Q
연천군에서 백학면을 선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백학면은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으로 나뉜 마을입니다. 마을 지도를 보면 누워 있는 한반도 모양이라 더 애틋하죠. 지리적 특성상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라고 합니다.
모든 연합군이 이곳에 머물며 전투를 치를 정도 였대요. 주민들 이야기의 80%가 전쟁일 정도로 상흔이 많이 남은 곳입니다.
게다가 백학면 두일리는 연천 지역 최초로 독립운동을 시작한 마을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호국 영웅 정신 계승 마을 제1호’로 선정되었고,
또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한국전쟁과 마을 역사를 기록한 백학역사박물관을 만드는 등 호국 마을로서 많은 스토리텔링을 축적해왔습니다.
이런 점을 인정받아 문화특화지역으로 선정되었죠.
Q
주민이 자발적으로 역사박물관을
만들었다고요.
그렇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주민들의 삶은 전쟁과 함께였지요. 밭을 일구면 탄피가 쏟아져 나오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지뢰에 목숨을 잃기도 하고…. 한국전쟁 당시 지게부대와 명마
레클리스(Reckless)로도 유명했어요. 지게부대는 민간인 신분으로 군을 도와 활약한 부대로, 한국전쟁의 숨은 영웅들이시죠. 레클리스는 당시 탄약을 운반하던 말로,
미국 <라이프(LIFE)>가 20세기 100대 영웅 중 하나로도 선정했을 정도로 큰 활약을 펼쳤답니다. 이런 역사를 후손에게 전하고 싶어 주민들 손으로 직접 박물관을 지었죠.
비록 규모는 작지만 낡은 철모와 소총, 탄약, 모형 지뢰 등 100여 점의 유물이 짜임새 있고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어요. 한쪽에는 제1땅굴 모형도 있고요.
Q
이 사업에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요?
그 당시 연천군 아이들을 대상으로 생태 문화 예술 프로그램 ‘꿈의 학교’를 진행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연천 출신이에요. 초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회화를 전공하고 큐레이터로 활동하다가 몸과 마음의 휴식을 위해 8년 전 고향인 연천으로 내려왔죠.
가드닝을 접목해 식물 카페를 열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어요. 지역 사람들과 소통하는 장소가 되기도, 문화 공간이 되기도 하더군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지역 활동을 하게 됐지요. 그게 연천의 아이들을 위한 ‘경기 꿈의 학교-우리마을 생태계’ 프로젝트였어요. 아이들에게 연천이 얼마나 소중하고
멋진 곳인지 알려주고 싶어서 숲 학교 콘셉트의 생태 관련 문화 예술 교육활동을 시작했는데 벌써 6년이 됐네요.
Q
그동안 어떤 활동을 했나요?
백학문화마을의 문화 예술 활동 공간 ‘DMZ백학문화활용소’를 만들어 다양한 전시, 프로그램, 교육,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백학면의 역사와 문화를 총정리한 ‘38선과 휴전선을 품은 백학’ 학술 연구 보고서와 책자를 만들고, 백학면의 13개 리를 통합하는 문화 예술 활동으로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13里里里’도 진행했습니다. 외부에서 활동하는 현대미술가 13명이 각 동네를 돌면서 그들의 시선으로 백학의 정서와 미감, 마을 이야기, 풍경 등을 담은 예술 작품을 기록·제작하고 전시까지 했죠.
또 농부와 예술가 및 상품 개발자가 모여 로컬 상품 홍보와 전시회를 열고, 백학의 오일장(3일·8일)에 맞춘 ‘참여형 38장 문화 프로그램’, ‘같이 가치 먹거리 이벤트’, ‘38장 플리마켓’도 진행했습니다.
Q
올해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올해가 정전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와 관련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어요.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진행할 생각입니다. 연천이 임진강 유네스코 지정 생물권보전지역이거든요. 생태 관련 활동가를 모셔서 아이들과 함께 이곳의 경관과 생태계 및 종·유전적
변이의 보전에 대해 고민해보고, 그것을 연극·무용 등 문화 예술 영역으로 확장해보려고 합니다.
Q
활동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요.
제가 순수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낙후된 곳을 재생하는 개념으로 문화 사업을 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오래되고 방치되었어도 그곳만의 가치가 분명히 있거든요.
그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고 보존하고, 그 상태로 재생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동안 외관을 정비하고 벽화를 그리는 사업은 다른 곳에서도 이미 많이 진행했잖아요.
백학만의 것을 남기고 보존해야지요. 문화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주민들께 사사로운 것 하나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김재원 예술감독은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평생을 사신 분들께 박수 쳐드리고 싶어요. 살기 힘들다고 등지지 않고 지금까지 잘 살아오셨다고, 그 삶이 바로 가치 있는 삶이라고 말이죠.”
주민들마저 스스로 외면하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봐주고 자부심을 키워주는 자세야말로 마을 문화 예술 교육 기획자가 지녀야 할 필수 덕목이 아닐까. 경기도 최북단, 전쟁의 상흔이 만연한 백학이
DMZ 접경의 대표적 문화 마을로 발돋움 하고 있다. 문화와 예술로 지난날의 총성을 지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 김재원 예술감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