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있어도 또 먹고 싶은 평택 고복수평양냉면

‘슴슴’한 맛. 평양냉면을 두고 하는 말이다. 냉면 예찬론자들은 슴슴한 맛이야말로 평양냉면이 ‘냉면 중의
냉면’이 된 비결이라고 말한다. 평택에 이 슴슴한 맛을 제대로 내는 평양냉면집이 있다.

글. 박찬일 사진. 전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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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서울에서 냉면 좀 드시던 분들은 신촌 평택고박사냉면을 손에 꼽곤 했다. 내가 어릴 때 신촌 연세대학교 앞은 엄청난 번화가였는데 형제갈비, 신촌설렁탕과 함께 유명한 식당으로 평택고박사냉면이 있었다. 신촌이 옛 영화를 잃어갈 무렵, 냉면집도 사라졌다. 워낙 특이한 이름이어서 잊을 수 없는 평택고박사냉면. 제일 궁금한 건 두 가지였다. 그동안 평택고박사냉면집은 왜 사라지다시피 했는가, 그리고 ‘박사’란 무슨 뜻인가.
“박사는 우리 아버지(고순은, 1921년생, 작고)가 박사처럼 똑똑하고 아는 게 많아서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에요. 그게 냉면집 상호가 된 거고요.” Since 1910, 평안도에서 역사가 시작되다 ‘고박사’는 이제 ‘고복수’가 됐다. 얼핏 비슷한데, 그냥 바꾼 게 아니다. 사연이 있다.
“집안에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동업을 했었는데, 현재 제가 상표권을 갖고 있지 않아요.”
3대 대표이자 현재 가게를 이끌고 있는 고복수(66) 씨의 말이다. 다시 말해 고박사라는 상호를 쓰지 못한다는 뜻이다. 저 간의 사정이 있으리라. 나는 냉면 육수부터 한 모금 들이켜며 호흡을 골랐다. 어?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낮게 흘러나온다. 맛있다. 서울에서 대세가 된 육즙 중심의 육수가 아니다.
“맞아요. 동치미를 섞어요. 그게 우리 아버지 방식이에요.”
먹어보니 냉면 맛이 살아 있다. 그렇지. 옛날에 먹었던 그 맛이 되살아난다. 혀에서. 한국 사회에서 냉면처럼 말 많은 음식도 없으리라. 심지어 지난 정권에서는 평양에서 파는 냉면과 남한 냉면이 다르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건 사실 해프닝이다. 북한 냉면이 메밀 부족과 입맛의 변화로 바뀐 것이고, 오히려 평안도 냉면 맛은 남한이 더 예스럽게 지켜가고 있다.
“할아버지(고학성)가 1910년 평안도(평북 강계군)에서 중앙면옥을 열었어요. 그게 이 집의 뿌리입니다. 그때부터 가게 역사를 칠 수는 없지만, 따지자면 우리 집이 100년 넘었어요.”
알다시피 일제강점기의 폭정과 궁핍이 있었다. 대체로 태평양전쟁 말기 패전 위기에 몰린 1944년부터 한반도의 번듯한 식당은 모두 문을 닫았다. 숟가락까지 쓸어가버린 판국에 식당을 계속 열 수 없었다. 식량은 배급제였고, 국민은 굶었다. 그 리고 다시 해방과 전쟁. 중앙면옥은 살아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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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6·25전쟁 때 한국으로 오시고, 평택에 자리 잡으면서 냉면집을 다시 열게 된 거죠. 돌고 돌아서요.”
여기서 놀라운 증언을 듣게 된다. 고복수 대표의 선친 고 옹(翁)은 고향에서 일본인과 싸우고 중국 만주로 독립운동을 하러 떠났다. 이 때 팔로군에 가담한다. 팔로군은 중국 인민 해방군의 부대로 당시는 일본군과 격렬하게 싸운 항일 유격 부대였다. 중국으로 떠난 우리 선조 다수가 이 부대에 참여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그는 이후 6·25전쟁에 동원되어 남한에 오게 된다. 파란 만장한 삶이다. 전쟁이 끝나고, 남한에서 고 옹은 평택 출신 아내를 만난다. 그리고 처가인 평택에 살게 되면서 생존하기 위해 기억을 더듬어 냉면집을 연다.
“평택역 앞 명동에 우리 가게가 있었어요. 구도심입니다.”

박찬일
누군가는 ‘글 쓰는 셰프’라고 하지만 본인은 ‘주방장’이라는 말을 가장 아낀다.
오래된 식당을 찾아다니며 주인장들의 생생한 증언과 장사 철학을 글로 쓰며 사회·문화적으로 노포의 가치를 알리는 데 일조했다.
저서로는 <백년식당>, <노포의 장사법> 등이 있고 <수요 미식회> 등 주요 방송에 출연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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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미자가 사랑한 이북식 냉면의 비밀은? 평택의 고박사냉면은 이북식으로 제대로 고기를 삶아 시원한 냉면을 냈다. 어복쟁반과 불고기, 이가 시릴 정도로 찬 물냉면은 이내 평택의 별미가 됐다. 당시 평택은 좋은 민물 낚시터가 많았는데, 서울의 한 언론인이 낚시하러 왔다가 고박사냉면의 단골이 됐다. 호방한 고 옹의 서비스가 좋았다고 한다. 그렇게 이곳은 서울에도 알려지게 된다.
“경부고속도로가 뚫리자 연예인들도 오더라고요. 천안, 대전, 대구 등에서 밤무대 공연을 뛰고 서울로 돌아가는 연예인들이 우리 집 명성을 듣고 하나둘 찾아오면서 더 유명해지게 됐어요. 그러다 신촌에 분점까지 낸 겁니다.”
옛이야기에 고복수 대표는 아스라한 추억에 젖는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인 듯하다. 당시 단골 연예인으로는 영화배우 김희갑 씨, 코미디언 이기동 씨 등이 있다.
“아버지와 각별하게 친했던 분은 영화배우 박노식 씨예요. 가수 최희준 씨, 이미자 씨도 오셨어요. 그때는 손으로 반죽해 일일이 분틀로 눌러서 내렸어요. 작대기를 당겨서 면을 수동으로 뽑는 방식이었죠. 그때 참 손님 많았습니다.”
고 대표는 아버지에게 이북 냉면의 역사를 많이 듣고 자랐다. ‘중앙면옥’ 이야기 말이다.
“기본적으로 통무를 겨울에 담가 그걸 꺼내서 썰고, 메밀 갈아서 면 뽑아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는 게 이북 냉면이라고 해요. 평양냉면은 꿩 얘기가 꼭 나오는데,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이북에 산이 많으니까 꿩도 많았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평택에서도 꿩을 구해 살코기랑 뼈를 칼등으로 다져서 완자를 만들어 냉면에 넣어주시는 걸 먹곤 했어요.”
고 대표는 여전히 동치미가 고복수평양냉면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육수와 동치미의 배합이 중요하다. 바삭한 이북식 빈대떡에 냉면을 마저 먹었다. 한 남자와 한 나라의 상상할 수 없는 우여곡절의 역사가 평택에 냉면집이 자리 잡은 계기가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면발을 집어 올리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고복수평양냉면은 오래도록 그 역사를 이어갈 것이다. 현재 고 대표의 아들도 냉면을 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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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
고복수평양냉면 주소 경기도 평택시 조개터로1번길 71
문의 031-655-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