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과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장로가 꿈꾼 이상촌 이야기
남양주 조안면

2024. 09

조안면은 다산 정약용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고향 사랑이 남달랐던 정약용은 토지제도를 개혁해 공동 경작하는 농업 공동체를 꿈꾸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후 봉안마을에서 ‘이상촌 운동’으로 실현되었고,
그 정신은 새마을운동으로 이어졌다.

글. 이정은
사진. 전재호
일제강점기 봉안 이상촌의 모습
마재마을 주민의 한강 변 나들이
1797년 초여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승정원에서 근무하던 정약용은 별안간 근무지를 이탈해 2박 3일간 고향인 마재마을(능내)을 찾는다. 그러고는 근처 열수(洌水)에서 형제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아 어탕을 끓이고, 시도 짓고, 술잔을 기울이며 초여름을 실컷 즐기다 복귀한다. 이탈 사유에 대해 다산은 “그저 소내에서 고기잡이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노라”고 밝혔다. 열수는 한강을 이르는 옛 이름이다.
다산은 유배지에서도 고기 잡던 나날을 그리워했고, 열수 가까이에 있는 고향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다시 돌아온 뒤에는 아예 열수라는 호를 쓸 정도였다.
마재마을이 있는 조안면은 그 열수를 따라 생긴 마을이다. 현재는 능내리, 조안리, 진중리, 송촌리, 시우리, 삼봉리 외 13개 리에 40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다산이 마재마을을 두고 “이 마을에서 취할 점은 오직 뛰어난 경치뿐”이라고 했을 정도로 풍경이 뛰어나지만, 사실 예전에는 살기 팍팍한 곳이었다. 홍수가 나면 마을 대부분이 잠길 정도로 수해가 심했다. 1925년 전국을 강타한 ‘을축년 대홍수’ 때는 마을이 모두 물에 잠겨 다산의 장서 상당 부분이 물에 휩쓸려 내려갔다고 한다.
“조안면은 북한강과 팔당호의 아름다운 수변 경관과 생태가 잘 보존된, 4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고장입니다. 그런데 그 내면에는 큰 아픔이 웅크리고 있지요. 면적의
약 80%가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여 발전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거든요.”
조안면 주민 단체인 팔당마을위원회 이양희 대표는 “팔당댐이 준공된 후 1975년부터 팔당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됐으며, 이후에는 수도권 규제,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개발은커녕 경제적 자립을 위한 여건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일례로 남양주시의 대표 작물 중 하나인 딸기는 조안면 일대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고 있다. 하지만 딸기를 가공해 잼이나 주스를 만들어 팔면 안 된다. 상수원 보호구역이라 제조업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펜션 등 숙박 시설은 물론이고 체험 학습 시설 설치도 안 되고 상표를 붙여 판매하거나 유통하는 것도 불법이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주민 870여 명이 범법자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강 맞은편인 양평 양수리는 규제가 적어 온갖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각종 개발 제한이나 규제, 보호구역 지정은 국토의 녹지를 보호하고 무분별한 개발을 제한하며 1,000만 수도권 주민의 식수원을 보호해야 하는 당위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유독 조안면만 꽁꽁 묶고 있는 다중 규제는 지역민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다. 이양희 대표는 지역 간 불공정 규제나 불균형을 완화하기 위한 정책의 조정과 보호 규제의 합리화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정약용이 꿈꾸던 농업 공동체, 김용기 장로가 꿈꾼 생활 공동체
유배 후 남은 인생을 고향에서 보낸 정약용은 고향에서 농촌의 이상향을 꿈꾸기도 했다. 정약용은 사회적 모순의 근본이던 토지제도 개혁을 주장했는데, 마을 단위 농업 공동체를 중심으로 공동경작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비록 공론에 그치며 실현되지 못했지만 훗날 그의 주장은 봉안마을에서 실행된다. 1930년대 김용기 장로가 봉안교회를 기반으로 ‘이상촌 운동’을 벌인 것이다. 초기 봉안 이상촌은 40~60명이 동참한 신앙 공동체이자 생활 공동체였다. 각종 과일과 채소, 고구마 농사와 양봉, 산양 키우기 등으로 마을의 경제적 발전을 모색·개선하고 금주·금연 운동과 야학을 운영하는 등 주민들을 계몽하는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일제의 압제가 극에 달한 1940년대에는 몽양 여운형 선생을 비롯한 항일운동가와 애국지사, 학병 징집 거부자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되면서 봉안 이상촌 건설은 미완성으로 끝난다. 그 경험은 가나안농군학교의 초석이 되었다.
가나안농군학교는 1962년 김용기 장로가 농촌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현재 하남시 풍산동에 설립한 기독교 합숙 교육기관으로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모델이 된다. 가나안농군학교에서 매일 새벽 5시에 울리던 ‘개척종’이 ‘새벽종이 울렸네’라는 새마을운동 노래로 이어진 것이다.
생태와 인문이 어우러진 21세기 이상향 마을을 꿈꾸며
“이상향 마을까지는 아니더라도 환경을 지키면서 경제적으로 잘사는 마을로 만들고 싶어요. 그런데 각종 규제로 일자리 창출이 어렵다 보니 젊은 세대는 공동화되고, 노인 세대만 남게 되네요. 땅을 사거나 집을 짓기 어려워 유입되는 이주민도 적고요.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팔당마을위원회입니다.”
이양희 대표는 “젊은 세대를 유입시키고, 앞선 세대의 경험을 마을 발전에 담아내는 고민이 필요했다”며 “팔당마을위원회에서 주민 간 갈등 해소와 마을 단위 연대, 공동체 회복을 목표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밝혔다. 2020년 경기도 마을 종합 지원사업을 3년간 진행한 팔당마을위원회는 이 과정에서 마을활동가 양성, 지역 문화 연구, 지역 학습 공동체 프로그램, 축제 등을 토대로 새롭게 ‘조안생태문화관광’으로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조안면은 각종 규제로 45년 동안 섬처럼 고립되었지만 그 덕분에 자연이 오염되거나 훼손되지 않았고, 전통적 공동체 문화도 비교적 해체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수도권에서는 흔치 않은 마을이다. 기후 위기로 생태적 가치가 더욱 커지고 있는 현시대에 생태와 인문이 어우러진 조안면은 마을의 새로운 대안 혹은 21세기 이상형 마을이 되지 않을까? 정약용이 태어나고 생을 마친 ‘여유당’ 앞에 흐르는 한강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물이다. 그 물길을 따라 이상촌을 꿈꾸던 정약용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기에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조안면으로 놀러 오세요
이양희 팔당마을위원회
마재성지
마재는 최초로 조선 땅에서 <천주실의>를 읽고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마을로, 초기 한국 천주교회 요람 역할을 했다. 정약용 형제들의 천주교 활동을 추모하기 위해 2006년 의정부교구가 조성한 마재성지는 도포 입은 예수와 한복 입은 성모 마리아를 만날 수 있는 성지이기도 하다.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698-44
문의 031-576-5412
팔당생명살림소비자생활협동조합
2001년에 설립된 팔당생명살림소비자생활협동조합은 맑은 물, 살아 숨 쉬는 흙, 안전한 먹거리를 목표로 더불어 사는 지역공동체를 꿈꾸며 팔당호수를 둘러싼 남양주, 양평, 하남, 구리의 농민과 시민이 함께 만든 비영리법인이다. 지역 생산자와 깊이 연관돼 있으며, 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주민 활동을 진행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북한강로 434
문의 031-577-8040
용진교회와 애국선열 추념탑
1907년에 설립된 용진교회는 남양주 3·1만세운동 중심지이기도 하다. 1919년 3·1운동 당시 용진교회 신도들은 남양주 와부 지역을 중심으로 집회에 참가했다. ‘배나무 용진 의거 사건’으로 불리는 용진교회의 3·1운동은 남양주 지역의 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교회 뒤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애국선열 추념탑이 세워져 있다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북한강로521번길 12
문의 031-576-1958
다산 정약용 유적지
정약용 선생 묘소, 생가인 여유당, 사당 문도사, 기념관, 문화관, 문화의 거리, 실학박물관 등이 있다. 기념관에는 정약용의 대표적 저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사본이 전시되어 있으며, 수원화성의 건축 현장을 재현한 디오라마를 볼 수 있다.
주소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747번길 11
문의 031-590-4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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