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빵을 찾아 전국을 순회하는 빵 덕후들이 즐겨 찾는,
제과 달인의 빵집이 김포에 있다. 바로 쉐프부랑제다.
“열다섯 살에 서울 와서 지금까지 제과 인생을 살았어요.” 얼핏 보면 제과사라기보다 대학교수 같은 풍모의 이병재(65) 제과 명인의 말이다. 전북 고창 출생인 그는 벌써 제과 제빵사로 50년을 살았다. “그때 다 어려운 시절이라 서울로 왔죠. 고향에 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지(소작)로 짓는 농사가 막막했다. 벌이를 해야 했다. 서울과 대도시로 러시가 이루어지던 시기다. 이른바 ‘먹여주고 재워주면’ 일했다. “무작정 상경은 아니었어요. 동네 선배가 이미 서울에서 제과일을 하고 있었어요. 초등학교 마치고 농사일을 돕다가 바로 왔어요.” 우리 동네 빵집은 단팥빵이 맛있다네 식당을 비롯한 먹는장사 노포를 15년째 취재해왔는데, 업종별로 보면 국밥집과 중국집이 제일 많다. 오랜 세월 시민에게 사랑받았다는 뜻이다. 희한하게도 제과점은 거의 없다. 프랜차이즈의 세력 확장 때문일까. 취재하는 동안 그가 이 시장을 돌파해온 비결을 알아챌 수 있었다. 우선 빵이 맛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쉬운 게 아니다. ‘맛있다’, ‘품질 좋다’, ‘가격 착하다’. 이런 조건을 두루 갖추기가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 빵·과자 맛을 안다고 생각하는데,
적어도 이 집은 맛으로 대한민국 1%다. 그게 핵심이다.
“과거 오래된 전통 빵·과자와 현대적인 걸 두루 잘해야 해요.
우리 단팥빵 한번 드셔보세요.”
단팥빵은 세대를 떠나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빵이다. 잘하면 대박이다. 이거 못 만들면 버티지 못한다. 특이하게도 모양이 좀 다르다.
단팥빵은 보통 위아래가 갈색이고 가운데는 연한 노란색을 띤다.
“그게 전통은 맞습니다. 하지만 변해야죠. 우리는 다른 오븐을 써요. 아주 고가예요. 컨벡션 오븐인데 빵 전체를 갈색으로 그을려줍니다.”
전통 단팥빵은 위아래로 열이 내려오고 올라오는 오븐을 쓴다. 그는 발상을 바꿨다. 열이 강제 순환되는 오븐이다. 그것도 최상급을 샀다.
단팥빵이 전체적으로 그을리면서 ‘마야르 반응’이 올라갔다. 이 반응은 당과 탄수화물, 지방 등이 열에
지져지면서 맛있는 성분이 증가하는 과학 현상이다. 그의 단팥 빵 맛이 놀라운 이유다.
“팥을 쑤는 게 제일 힘들어요. 직접 다 쒀요. 알갱이가 부드럽게 씹힐 때까지 타이밍을 잡는 게 중요하죠.”
뭔가 다른 데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그는 고창에서 올라온 그 날 서울역 앞 ‘대도제과점’에 취직했다. 월급은 몇천 원인가 받았다.
먹고 자는 조건이었다. 휴일은 없었다. 누구나 그럴 때였다. “아침 5시에 작업을 시작해요. 반죽을 비롯해 여러 일을 합니다. \그러면 밤 10시쯤 끝나요. 반죽이 제일 큰일이지요. 전날
쳐서 발효해놓은 거 있으면 2차 반죽하고, 새로 할 건 하고.”
박찬일
누군가는 ‘글 쓰는 셰프’라고 하지만 본인은 ‘주방장’이라는 말을 가장 아낀다.
오래된 식당을 찾아다니며 주인장들의 생생한 증언과 장사 철학을 글로 쓰며 사회·문화적으로 노포의 가치를 알리는 데 일조했다.
저서로는 <백년식당>, <노포의 장사법> 등이 있고 <수요 미식회> 등 주요 방송에 출연해왔다.
김포를 사로잡은 빵 맛, ‘백년가게’로 인증받다
젊으니까 할 수 있었다. 손 반죽도 흔했고, 큰 가게는 기계 반죽을 했다. 어쨌거나 일이 많았다. 반죽, 성형(모양 내기), 굽기,
포장, 판매. 대개 포장과 판매는 홀에서 일하는 여직원들 몫이었다. 과자도 많이 구웠다.
“작은 틀이 있어요. 가스불 피워 묽게 반죽해 전병(센베이)도
많이 구웠죠, 김 붙이고 해서.”
그는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밤 10시에 일이 끝나면 통신
강의록과 ‘일일공부’ 같은 학습지를 펼쳤다. 늘 잠이 모자랐다.
“한 2년 그렇게 했어요. 중학교 과정을요. 그러다가 코피 쏟고, 너무 피곤해서 그만두고 일만 열심히 하자 했어요. 가방 끈은 짧아도
빵·과자는 내가 제일 잘 굽겠다, 결심했죠.”
그는 몇 년 후 스카우트되어 직장을 옮겼다. 롯데호텔과 쇼핑센터가 들어서기 전 을지로에 있던 유명 제과점이었다. 군대도 가기 전이었다.
그러다가 마산에 코아백화점이 문을 열고 근처에 대형 제과점도 생겼다. 그때 그를 잘 본 제과장이 또
스카우트를 했다. 월급도 같은 경력의 제과사보다 2배쯤 더 받았다. 그러다가 서울로 와서 군 복무를 했다. 한국이 고도 성장하던 시기였다.
그의 기술도, 제과점도 쑥쑥 자랐다. 그는 유명한 군산 이성당에서 일한 경력도 있다.
“제대하고 다시 마산 가서 부공장장 하던 때였어요. 명동에
청자당이라고 유명한 제과점이 있는데, 그곳 출신 선배를 통해 이성당 가서 몇 년 했죠. 80년대 군사정권 때였어요.”
그도 개업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제과점 우두머리 기술자를
공장장이라고 하는데, 그 자리를 맡아서 하다가 보통 일정 시기가 되면 개업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도 개업에 대해 알아본 후 서울 양재동에 ‘힐튼빵집’을 차렸다. 아내의 도움이 컸다.
“결혼도 하고, 이제 내 가게를 내야겠다 싶었어요. 그렇게 시작한 게 힐튼이에요. 개인 빵집은 무조건 빵이 좋아야 합니다.
빵, 케이크를 많이 팔았어요. 아이까지 생기니 더 열심히 하게 되더군요.”
그렇게 시작한 제빵 인생. 그 후 김포 사우동에 와서 현재까지 운영 중인 ‘쉐프부랑제’를 차렸다. 벌써 20년이 넘었다. 한 자리에서
김포의 도시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인증한 ‘백년가게’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의 일은 이제
아들 둘이 이어서 하고 있다. 아들들이 관리하는 제과점 주방을 보니 엄청 깨끗하고 현대적이다. 믿고 먹을 수 있는 제과점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이제 아이들이 물려받아서 해요. 저는 관리 잘해서 우리 가게가 50년, 100년 가도록 애를 써야지요.” 백년가게, 노포가 유독 드문 제과점 세계에서
그의 자리가 더 중요해 보였다.
Info
김포 쉐프부랑제
주소 경기도 김포시 사우중로 82
사우프라자
영업시간 07:00~11:30
(주말 영업 유동적)
문의 031-998-1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