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로 키우고 싶으면
과학책을 주지 마세요
이정모 펭귄각종과학관 관장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알려진 이정모 관장은 환갑을 맞아 책과 한판 놀아보자며
전국을 돌면서 책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책, 서점, 도서관이 자신의 인생을 풍요롭게 했다는
그가 아이들의 독서력 키우는 방법을 전한다.

글. 이선민 사진. 전재호
전세피해지원센터2

이정모 관장과 인터뷰를 위해 만나기로 한 장소는 ‘펭귄각종과학관’이었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관장, 서울시립과학관 관장을 거쳐 국립과천과학관 수장으로 일한 그를 10여 년 동안 관장이라 부르던 사람들이 호칭을 고민하기에 아예 과학관을 차렸다고. 어릴 때부터 별명이던 펭귄과 여러 과학관을 경험했다는 뜻에서 ‘각종’을 넣어 이름 지었다. 사무실은 일산의 한 중견 서점 안에 자리한다. 책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라는 그에게 걸맞은 곳이다.
“세상에서 벌어먹고 살 수 있는 기회를 도서관과 서점, 책을 통해 얻었어요. 책을 쓰고, 강연을 하고,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책이 있었지요. 서점과 책방이 없었다면 제가 대한민국 과학관 관장이 될 수 있었을까요?”
책, 서점, 도서관은 그에게 환갑임에도 끊임없이 할 일을 준다. 지금은 동갑내기 친구들과 전국에서 1년 내내 환갑잔치를 벌이는 중이다. 평생 책과 도서관 문화를 가꾸는 데 헌신해온 이권우 평론가, 시민과 과학을 잇는 매개 역할을 하는 과학 책방 ‘갈다’ 이명현 대표 등 여러 친구와 함께 일평생 서점·도서관에서 받은 것을 돌려주기 위해 ‘환갑삼이 전국 투어 강연’을 다니고 있다. 교통비와 숙박비를 제외하고는 비용도 받지 않고 동네 책방에서 사람들과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처음에는 10회만 하려고 했는데, 자꾸 요청이 들어와 어느새 22회째 대장정에 나서고 있다. 좋아하는 책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은퇴 후 우울함은커녕 하루하루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어릴수록 문학을 통해 독서력을 키워주세요

그는 털보 관장, 수다쟁이 공룡 바보, 펭귄 등 많은 별명을 갖고 있다. 또 과학 커뮤니케이터로도 유명하다. 그가 사람들에게 과학을 알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그는 과학을 인문·철학·역사 등 다양한 분야와 접목해 이해를 돕는다. 모두 책, 서점, 도서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릴 때는 가난해서 책 한 권 가져본 적이 없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이모가 사준 <꽃들에게 사랑을>이 제 첫 책이었어요. 얼마나 좋았던지. 책을 읽고 싶어도 환경 때문에 폭넓게 읽지 못한 것이 화가 나기도 해요. 정말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 6년 동안 죽어라 책을 읽었는데,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는 대학에 와서 알았어요. 청소년기에 좀 더 다양한 책을 읽었다면 제 세상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아쉬움이 커요. 그래서 독서에는 지도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래서일까. 가끔 자녀에게 과학책이나 인문책을 읽으라고 하는 부모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이 관장은 세계 최고 교육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빌려 초등학교 1·2학년 때는 과학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아이가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3학년 때부터 과학을 공부한다 해도 단순 지식일 뿐 과학 원리는 중학교에 진학한 후 배우게 된다. 발달 과정에 맞춘 교과과정인데, 부모들이 자꾸 어릴 때부터 과학책을 권해 오히려 아이들이 과학과 멀어지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어릴 때 과학책을 읽으면 지식은 조금 얻겠지만,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으로 나뉘게 합니다. 또 인문학이나 과학책은 굉장히 논리적 구조입니다. 너무 논리적이라 독서력이 늘지 않죠. 정보만 흡수할 뿐 상상이나 흥미를 느끼게 하는 독서력은 키우기 힘들어요.”
이 관장은 어릴수록 문학책을 많이 읽게 하라고 권했다. 문학책을 읽다 보면 다음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상상하게 되고, 스스로 이야기 구조도 만들어보기 마련이다. 또 단단하게 성장하려면 실패도 많이 겪어봐야 하는데, 문학책은 실패의 간접경험 창구가 된다. 모든 문학에는 실패담이 나오는데, 주인공이 이를 극복하는 것을 보고 회복 탄력성을 얻게 된다. 이 관장은 어릴 때 문학으로 단단하게 훈련된 아이들은 나중에 인문과 과학, 철학 어떤 분야든 쉽게 받아들인다고 강조했다.
만약 과학책을 꼭 읽히고 싶다면 만화책이나 유튜브로 충분하다고 귀띔했다.

전세피해지원센터2

“세상에서 벌어먹고 살 수 있는 기회를 도서관과 서점, 책을 통해 얻었어요.
책을 쓰고, 강연을 하고,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의 바탕에는 책이 있었지요.
서점과 책방이 없었다면 제가 대한민국 과학관의 관장이 될 수 있었겠어요?”


서점에서 스스로 책 고르는 훈련을 시키세요 이 관장은 아이들에게 부모 세대의 방식을 고집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책이나 사전 등 예전 방식의 공부법을 강요하거나 휴대폰, 컴퓨터가 공부에 방해된다고 타박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했던 방식으로 성공한 사람은 보기 드물어요. 그렇게 공부했는데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책을 읽었는데 지식이 그다지 늘지도 않았잖아요. 자신이 실패한 방식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면 안 되죠.”
대신 아이에게 돈을 주고 직접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게 한다. 처음에는 돈이 아까운 책을 고르기도 하지만, 아이들 스스로 판단 능력이 있기에 어느 순간 자신이 좋아하는 책이 무엇인지,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 깨달을 것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으며 그 사람의 다른 책을 찾아보고, 비슷한 분야의 다른 책을 읽게 되는 식으로 성장한다. 그래서 아이에게 좋아하는 작가를 만들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단, 교보문고처럼 큰 서점이 아닌 중간 규모의 지역 서점을 가야 한다. 대형 서점은 책을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배치해 아이가 선택하기 어려운 환경이지만, 일산의 한양문고 같은 중간 규모 서점은 다양한 책을 편하게 찾아볼 수 있다.


“어릴 때 과학책을 읽으면 지식은 조금 얻겠지만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으로 나뉘게 합니다. 또 인문학이나 과학책은 굉장히 논리적인 구조입니다.
너무 논리적이라 독서력이 늘지 않아요. 정보만 흡수할 뿐 상상력이나
흥미를 느끼게 하는 독서력은 키우기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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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환경 생활은 있는 것을 활용하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요즘 그의 가장 큰 관심 분야는 기후다. 그는 자신이 경기도민인데, 지자체 중 경기도가 기후 위기 대응에 가장 적극적이라 기분이 좋단다.
“강연을 다니면서 보니까 지자체별로 많이 다르더라고요. 광주에 강연을 갔는데 ‘기후가 복지다’라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어요. 지난겨울 난방비가 엄청 오르면서 21만 가구가 난방을 못 했다고 하더라고요. 광주의 공무원들은 기후가 난방비 상승의 큰 원인이니 앞으로 복지 정책은 기후에 맞춰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공무원이 각성해야 지자체 정책이 잘 이루어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관장은 텀블러와 에코백이 너무 많아도 기후 위기 극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정말 환경을 생각한다면 물건을 새로 장만하는 대신 갖고 있는 것을 잘 쓰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면이 부족해 그가 풀어놓은 기후 위기 극복 대책을 다 담지 못했지만, 항상 호기심을 잃지 않고 현재 문제를 과학적 근거로 제시하는 이정모 관장은 아직도 청년의 활기가 넘쳤다.

이정모 전 국립과천과학관 관장으로 연세대학교 생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본 대학교 화학과에서 곤충과 식물의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했으며, 안양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일했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 관장, 서울시립과학관 관장으로 재직하면서 자연사박물관과 과학관을 일상적으로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2019년에는 교양 과학서를 저술·번역하고 자연사박물관과 과학관의 새로운 모델을 구현해 과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과학기술훈장 진보장을 수상했다. 최근에는 ‘책’, ‘과학’, ‘나이 듦’이라는 공통 주제로 우정을 쌓아온 우리 시대 지성인 이권우·이명현·이정모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뇌과학자 정재승, 장대익, 김상욱과 과학에 관한 아주특별한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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