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손맛 잇는 장터국밥
안성 안일옥

현재 우리나라에는 100년 된 식당이 딱 5개 있고,
안일옥이 그 안에 든다.
오늘도 안성장터에서 한식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국밥집을 찾았다.

글. 박찬일 사진. 전재호






뜨끈한 장터국밥이 한 그릇 놓였다. 훌훌 떠먹는데, 맛이 혀에 익다. 그렇다. 시장국밥이나 소고기국밥, 아니면 장터국밥이라고 하는, 고춧가루 풀어 시원하고 얼큰하게 끓인 소고깃국 맛이 내 기억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100년 역사, 안일옥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맞습니다. 이 국밥이 유명하지요. 여전히 국밥을 끓이고 있어요. 메뉴는 조금 늘었는데, 다 국밥 종류지요.”
사장 김종열(62) 씨의 말이다. 그는 최근 개업 100주년을 기념해 소박한 책도 한 권 냈다. 가게를 처음 연 조부모님, 키워낸 부모님을 기리는 책이다. 가계(家系)이면서 가게의 역사를 담은 책인데, 어쩌면 한국 외식사의 한 맥을 잇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100년이라. 3대를 이어야 하기에 한국 현대사에서 백년 식당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한일 강제 병합, 일제강점기의 수탈과 고난, 한국전쟁 등 격변하는 현대사로 인해 한국은 뚝심과 인내로 이어가야 하는 식당을 보유할 수 없었다. 전쟁 중 폭격을 맞아 ‘명동성당 빼고 다 없어졌다’는 서울 땅에 백년 식당이 그나마 딱 하나 (이문설농탕) 있는 게 용할 정도다.

SINCE 1920, 안성 장터에서 역사가 시작되다 안일옥은 1920년 김점복〮이성례 부부가 안성 장터에서 처음 시작했다. 번듯한 가게였을 리 만무하다.
“할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먹고살아야 하니 할머니가 장터에 나가 솥을 거신 거지요. 난전이었어요.”

안성은 한양, 개성과 함께 전국 3대 장으로 불렸다. 돈과 물건이 지천이었다. 유기와 농산물이 유명해 안성에 부자가 많다는 말도 그때 생겼다. 우시장도 컸다. 안성은 농사도 크게 지어서 소 수요가 많았다. 우시장이 크면 국밥 장사가 잘된다. 도축장이 생겨 부산물이 흔하기 때문이다.
김종열 사장의 기억에는 할머니 고생이 컸다. 국밥은 장날 파는 것이니,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다른 날에는 고기며 부산물을 함지에 담아 이고 멀리 팔러 다녔다고 한다. 그렇게 성장해온 가게가 안일옥이다. 할머니는 1975년 작고했다.
지금 안일옥은 메뉴가 좀 늘었다. 전통 장터국밥은 여전히 인기고, 고기 맛이 좀 더 풍성한 안성맞춤우탕과 설렁탕, 갈비탕 등을 낸다. 안성맞춤우탕은 좀 비싸지만(2만2,000원) 소 한 마리에서 나오는 갖가지 부위와 살코기가 넉넉하게 들어가 ‘특’이라는 이름에 걸맞다. 소 여러 부위가 들어가 ‘소한마리탕’이라고도 한다. 이 메뉴는 손님 덕분에 탄생했다. 도가니탕을 먹을까, 꼬리곰탕을 먹을까 고민하는 손님을 보고 착안해 반씩 넣어주는 메뉴를 만들었다.

가난한 서민을 더 챙긴 양귀비 할머니 장터국밥이 시그니처 메뉴인 안일옥은 설렁탕집으로도 불리는데, 김종열 사장은 ‘우탕’집으로 본다. 소에서 나오는 이것저것을 넣어 끓인 탕을 통틀어 우탕이라고 하는데, 김 사장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지금이야 메뉴를 정하고 그에 맞는 재료를 조달하기가 쉽습니다만, 과거에는 불가능했어요. 도축해서 나오는 부위와 양이 그때그때 달랐고. 메뉴도 도축하는 날마다 조금씩 바뀌는 거죠.” 그래서 안일옥의 메뉴는 우탕이라는 큰 지붕 아래 이런저런 재료가 들어가 있는 것 같다. 흥미로운 건 그의 어릴 적 기억이다. 안일옥은 장터나 시내에 있는 일반 식당이 아니라 안성의 영양 공급소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사람들이 밥을 싸 들고 오기도 해요. 국물을 얼마어치 달라, 돈이 없으니 탕을 반만 달라, 이런 주문을 할 수 있는 거죠. 어머니가 다알고 챙겼어요. 배고픈 사람들, 돈 없는 사람들한테 국물 더 주고 고기 더 얹어줬지요. 그게 안일옥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 성함은 양귀비(1918년생), 2007년 작고했다. 그이가 안일옥을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렸고, 안성에 가게 이름을 널리 알렸다. 안성 시내 사람치고 ‘양귀비 할머니’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했다. 양귀비 할머니는 단골 한 사람 한 사람의 식성을 알았다. 고춧가루〮파〮마늘 많이 먹는 사람과 안 먹는 사람, 신김치파(派)와 겉절이파까지 따로 챙겼다. 비상한 기억력과 손님에 대한 애정으로 가게를 일궜다. 그이는 늘 베풀고 퍼주는 할머니였다. 불우한 이들에게 돈도 많이 썼다. 나라에서 상도 많이 내렸다. 그가 작고하자 안성 시내가 다 침통해했다. 김유신 시인은 조시를 지어 바치기도 했다.
안일옥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역사적이다. 전쟁통에 허가니 승인이니 있을 리 없었다. 그런 시대가 꽤 오래갔다. 적어도 1950~1960년대에는 식당과 술집 다수가 무허가였다. 그래서 안일옥의 상호도 나중에 만들어졌다. 읍사무소에 가서 신고를 하는데 상호를 지어 가지 않았다. 담당 직원이 즉석에서 안성에서 제일가는 집이니 ‘안일옥(安一屋)’으로 하자고 한 것이다. 안일옥은 3대를 이어 4대를 보고 있다. 그만큼 역사가 되었다. 김종열 사장은 양귀비 할머니의 3남으로, 원래 서울에서 직장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97년 IMF 외환 위기에 형이 꾸리던 가게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문제가 생겼다. 어머니가 그를 불렀다. 번창하던 제약 회사를 그만두고 그가 고향 안성으로 내려오면서 안일옥은 그렇게 3대를 이어가고 있다.

노포의 역사, 4대로 이어진다 안일옥은 탕도 탕이지만 맛의 비결로 김치를 꼽는다. 겉절이가 나오는데, 하루에 두 번 담근다. 깍두기는 일주일에 한 번, 한꺼번에 준비한다. 탕집은 김치가 맛있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의지가 여전히 가게에 스며 있다. 배추가 아무리 비싸도, 겉절이는 싱싱하게 담근다.
원래 안일옥도 토렴을 전문으로 했다. 양귀비 할머니의 옛 사진을 보면 토렴할 때 쓰는 국자를 쥐고 있는 모습이 유독 많다. 토렴이란 찬밥을 데우기 위해 뜨거운 국물을 몇 번이고 밥을 담은 뚝배기에 부어서 온도를 올리는 작업이다. 시간이 걸리고 뜨겁다. 토렴한 국밥은 찬 밥알에 국물이 흡수되어 더 맛있고, 온도도 적당해 빨리 먹을 수 있어 ‘노동 음식’으로 유용하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안일옥도 따로국밥을 낸다.
구멍이 나는 바람에 몇 번이나 솥을 바꿔 가면서도 안일옥은 가마솥을 쓴다. 1년 내내 명절 며칠을 제외하고는 불이 꺼지지 않는 솥이다. 노포의 특징이기도 하다. 현재 안일옥은 4대를 준비하고 있다. 김 사장의 아들(형우)이 안일옥에 합류했다. 노포의 맛을 전국에 알리기 위한 밀키트 사업을 전담한다. 일찍이 조리과학고를 나오고 외국 유학을 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요리인이 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전통이 어우러진 새로운 시대의 안일옥을 기대해봐도 좋겠다.
글을 쓰는 지금 아직도 안일옥의 국물 맛이 혀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양귀비 할머니의 말씀처럼 담백하게, 깔끔한 뒷맛으로. 안일옥은 그렇게 살아남을 것이다.

박찬일 누군가는 ‘글 쓰는 셰프’라고 하지만 본인은 ‘주방장’이라는 말을 가장 아낀다.
오래된 식당을 찾아다니며 주인장들의 생생한 증언과 장사 철학을 글로 쓰며 사회·문화적으로 노포의 가치를 알리는 데 일조했다. 저서로는 <백년식당>, <노포의 장사법> 등이 있고 <수요 미식회> 등 주요 방송에 출연해왔다.

안일옥 주소 경기도 안성시 중앙로411번길 20
문의 031-675-24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