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에는
지수당이라는 인공 연못과 정자가 있다.
산중에서 보기 드문 풍광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청나라 대군이 공격해 오자 임금과 조정 대신들은 적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숨어든다. 추위와 굶주림, 절대적인 군사적 열세 속에서 청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황,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에서 인조는 45일을 견디다 결국 삼전도(현 석촌호수)까지 걸어가 청 태종에게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리며 치욕적인 항복을 한다.
삼전도 굴욕의 아픔을 간직한 남한산성은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672)의 옛터를 활용해 인조 4년(1626)에 대대적으로 구축한 국가의 보장처(전쟁 시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곳)로
천혜의 요새였다.
또 남한산성은 다른 산성들과 달리 산성 내에 마을과 종묘사직을 갖추었다. 전쟁이나 나라에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 임금은 한양도성에서 나와 남한산성 행궁에 머무르고, 종묘에 있는 선조의
신주(神主)를 옮길 수 있는 좌전을 마련해 조선의 임시 수도 역할을 했다.
그러다 보니 남한산성에는 아직도 문화재가 많고, 총 12.4km에 달하는 성곽도 잘 보존되어 있어 2014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백성을 포용하고 기른다
남한산성에는 행궁·수어장대·숭열전·현절사·청량당 등 다양한 문화재가 있는데, 그중 연못과 함께 있는 지수당(池水堂)이 유독 눈에 띈다. 산중에 연못이라니… 도대체 누가, 왜 지었을까? 지수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연못은 ⊂ 자형으로 파서 정자를 둘러싼 특이한 형태를 띤다. 건립 당시에 건물을 중심으로 앞뒤에 연못이
3개 있었으나, 1925년 대홍수로 지형이 허물어져 하나는 매몰되어 논이 되고 지금은 2개만 남아 있다. 연못 가운데 관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터만 있다. 지금도 운치 있는 이곳에 연못과
관어정이 남아 있었다면 풍광이 더 수려했을 것이다.
지수당은 광주(廣州) 부윤(조선 시대 지방관청인 부의 우두머리)이던 이세화가 1672년에 지었다. 이세화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인현왕후 폐위 시 상소를 올렸다가 문초를 당하고 귀양을 가지만
그 뒤 복직되어 공조·형조·병조·예조·이조판서 등을 두루 거친 출중한 인물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고관들의 낚시터로 이곳을 만들었다 하는데, 지수당의 뜻이 ‘군자는 백성들을 잘 포용해 잘 살도록
길러나간다’ 인 것을 보면 더 깊은 뜻이 있지 않았을까? 지수당을 지은 시기가 남한산성의 치욕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으니, 병자호란 때 백성들이 겪은 아픔을 함께 벗어나고자 한 것은 아니 었을까?
조선 후기 명신 남구만이 이세화를 두고 <약천집(藥泉集)>에 “고고한 인품으로 저 멀리 천 길 위의 창공을 나는 봉황에라도 비할수 있을 것”이라고 칭찬할 만큼 선정을 베푼 청백리였다고 하니
왠지 후자에 방점을 찍고 싶다. 지수당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주소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124-1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