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잡코리아 흥망성쇠
사라진 직업들

새로운 직업이 생겨나는가 하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추억의 직업도 있다.
한국 경제의 성장과 궤적을 같이해온 잡코리아 흥망성쇠에서 근현대사 이후 사라진 직업을 살펴보자

글. 김영은


조선시대

조선 경제활동의 중심 보부상 과거 조선 팔도를 누비며 경제활동의 중심에 있던 ‘보부상’은 전국 각지를 돌며 일용 잡화를 판매하는 행상을 일컫는다. 옷감·종이·바늘·장신구 등 비교적 가벼운 세공품이나 값비싼 사치품 등을 취급하며 이를 보자기나 걸망에 싸서 다니는 봇짐장수를 ‘보상’이라고 하는 반면, ‘부상’은 소금·미역·무쇠솥 등 일용품을 지게에 메고 다니며 팔던 등짐장수를 말한다. 보부상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고려 공양왕 때 이들에게 소금을 운반토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국가의 보호를 받는 보부상은 유사시 정치적 활동을 수행하며, 전시에는 조직을 구성해 나라를 지켜내기도 한다. 1879년(고종 19) 9월에 발표된 ‘한성부완문’에 따르면 보부상은 전국적으로 조직력을 갖추게 된다. 이후 분리와 통합을 반복하다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이 사라지고 개항 이후 새로운 경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취를 완전히 감추게 된다.

수입과 파워가 대단했던 물장수 조선의 직업을 소개하는 책 <조선잡사>를 보면 사농공상 계급사회에서 보통의 사람들이 먹고살았던 67가지 직업을 만날 수 있다. 호랑이 잡는 착호갑사, 매를 대신 맞는 매품팔이, 소설 읽어주는 전기수, 똥을 퍼 나르는 똥지게꾼, 짚신 장수 등이 그것이다. 조선 시대 화가 단원 김홍도가 그린 ‘평양감사환영도’를 보면 상투를 쓴 물장수가 물동이를 지게에 진 채 맨발로 다니는 모습이 나온다. 1800년대를 전후해 생겨난 물장수는 상수도 시설이 없던 시절 계곡이나 하천에서 물을 길어다 돈을 받고 각 가정에 판매했다. 개항 이후에는 자연스레 하나의 직업으로 자리매김했는데, 물장수가 한창 성행하던 시기에는 단골 구역이 생겼으며, 이에 따른 독점 영업권 보장을 위해 수상조합을 결성하고 급수권을 관리했다. 물통은 물장수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다. 그들은 나무 물통 두 개를 물지게 양 끝에 매달아 물을 운반했다. 이후 양철통으로 대체되었다. 육체노동 강도가 높았던 물장수는 그만큼 수입도 좋았으며, 그 못지않게 파워 역시 상당했다. 덕분에 ‘북청 물장수’라는 말도 생겨났다. 하지만 물장수는 1908년 9월 1일, 대한수도회사의 상수도 보급을 기점으로 쇠퇴의 길을 맞는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해오다 1914년 수상조합이 폐지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척박한 삶을 살았던 인력거꾼 1883년 한성부판윤 박영효에 의해 처음 도입된 인력거. 인력거꾼은 인력거를 끄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 자동차와 버스가 없던 시절, 상업적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건 1894년이다. 인력거는 부산이나 평양, 대구 등 지방 도시에 급속히 늘어났다. 특히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는 골목이나 언덕에서도 운행이 용이해 큰 인기를 얻었다. 인력거를 끌며 사람들의 이동을 도와주던 인력거꾼은 당시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직업이었다. 고된 노동에 비해 벌이가 시원치 않았던 만큼 대부분 인력거꾼의 삶은 척박했다. 소설 <운수 좋은 날>에 인력거꾼의 힘든 생활상이 잘 담겨 있다. 1911년 1,217대이던 인력거는 1923년 4,647대로 그 수가 크게 늘어난다. 이에 영업허가, 자질, 교통 규칙 등을 명시하는 ‘인력거영업단속규칙’이 공표된다. 하지만 1930년대 인력거는 점차 늘어나는 임대 승용차(택시)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간다. 광복과 더불어 서울에서 자취를 감춘 인력거는 일부 지방에서는 한국전쟁 전후까지 운행되다가 사라졌다. 지금은 서울북촌(아띠인력거)과 홍대(헤이라이더) 등지에서 관광용으로만 볼 수 있다.

선망 받는 인기 직업 전차 운전사 1899년에 돈의문에서 흥인지문까지 전차가 개통된다. 당시 4개 노선으로 운영되던 전차는 일제강점기 말인 1943년 지선을 포함해 16개 노선으로 확대된다. 도성 안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노선도 점차 도성 밖으로 뻗어 나갔다. 시민들의 여가 생활을 위해 뚝섬까지 운행하는 전차가 생기는 등 전차는 1968년 마지막 운행을 마칠 때까지 서울을 중심으로 각지의 이동을 돕는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존재했다. 검은색 상·하의에 흰색에 흰색 셔츠를 매치한 깔끔한 정장 스타일의 제복을 입은 당시 전차 운전사와 차장은 누구나 선망하는 인기 직업 중 하나였다. 하지만 1968년 11월 29일 밤, 동대문 종점으로 들어오는 303호 전차의 운행을 끝으로 전차 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차 운전사는 물론 전차 수리공, 조립공 등 관련 직업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40~1960년대

여성에게 인기 전문직 전화교환원 오늘날처럼 자동 통화 연결이 불가능하던 시절, 사람들은 원하는 상대와 전화 통화를 하기 위해 수동식 전화를 교환해주는 전화교환원을 거쳐야 했다. 1896년, 덕수궁 내부에 자석식 전화기가 설치되고 처음 개통된 이후 일반인이 전화를 사용하게 된 것은 1902년 한성전화소가 설치되고 교환 업무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초기 전화교환원은 대부분이 남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다 1920년대 이후 여성들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이 또한 처음에는 일본 여성이 대부분 자리를 차지했으나 점차 조선 여성의 수가 늘어났다. 전화 교환원은 전문직으로 여성에게 인기가 많았다. 1970년대 교환원을 거치는 수동식 전화인 ‘흑통’과 교환원을 거치지 않는 자동식 전화인 ‘백통’의 시대를 거쳐 통신 시설이 발달하고 자동 연결이 가능해지면서 해당 직업은 자연스레 역사 속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똥 지게꾼으로 불리던분뇨 수거인 1955년부터 2000년대까지 신문에 연재된 네 컷 시사 만화 <고바우 영감>에는 똥 치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등장한다. 김성환 작가는 “경무대는 똥 치우는 사람도 권력이 있다”라며 당시 정부를 풍자했다. 이 일로 연행된 작가는 벌금 4만5,000환(현재 가치 500만 원 상당)을 선고받았다. 주목할 것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기다란 장대 양 끝으로 분뇨통을 달고 다니는 남자들의 모습이다. 일명 ‘똥지게꾼’으로 불리던 이들은 분뇨 수거인으로, 이는 당시 매우 흔한 직업 중 하나였다. 이후 수세식 변기가 대중화되면서 사라져 현대인에게는 매우 낯선 직업이 되었다.

오라~이버스 안내양 1960년대부터 1980년대를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라~이’를 외치던 버스 안내양에 대한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그 당시를 담은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를 보면 유니폼을 입고 모자를 눌러쓴 그 시절 버스 안내양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버스 안내양은 1931년 서울에 유람 버스가 생기면서 처음 등장했다. 이후 1961년, ‘버스 안내원과 자율버스 여차장 제도’가 본격 도입되면서 버스 회사들은 앞다퉈 버스 안내양을 모집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버스에서 승객들의 안전한 승하차를 돕고 도착지를 안내하며, 요금을 받고 출입문을 여닫는 업무를 수행했다. 보통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거나 일자리를 찾아 시골에서 상경한 여성이 주를 이루었는데, 빡빡한 노동시간과 강도 높은 시달림에 시대의 애환이 서린 직업이라 할 수 있다. 버스 안내양은 1982년 ‘시민자율버스 운행제’가 실시되고 정류장 자동 안내 방송, 하차 벨, 자동문 등 자동화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점차 사양길로 접어든다. 그러다 1989년 12월, 관련 법 조문이 삭제되면서 대한민국에서 영영 사라진 직업이 되었다. 그 마지막은 1989년 4월, 김포교통 소속 130번 버스에서 근무하던 38명의 안내양이다.

당시 유일한 문화 진행자 소리사 소리사는 그 시절 유일한 문화 채널이던 스피커를 관장하던 사람이다. 당시 라디오는 대부분 고가의 일제 트랜지스터였다. 국산은 합판 박스에 엉성한 구조였던 만큼 잡음이 심했다. 이마저도 고가여서 각 가정에 보급되기는 언감생심이었다. 이에 소리사는 스피커 장치를 달아놓고 유선을 연결해 각 가정으로 방송을 송출했다. 채널 선택권도 없이 그저 소리사가 송출하는 대로 뉴스, 노래, 연속극 등을 열심히 듣던 시절, 스피커는 그 당시 유일한 문화 채널이었다. 읍내 중학교 신입생 합격자 발표나 면사무소 주요 공지 사항 역시 이 스피커를 통해 전달됐다. 각 가정은 유선방송을 청취하는 대가로 봄과 가을, 일정량의 곡식을 소리사에게 주었다. 꽤 짭짤한 수익을 올린 소리사는 금성전자대리점, 대우전자대리점 등으로 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