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작가
이재연의 그림 세상

아내로, 엄마로 살다가 일흔이 넘어서야 붓을 든 이재연 작가는
투박하지만 정감이 느껴지는 그림으로 어린 시절의 추억을 소환한다.
연륜과 감성이 따스하게 담긴 그의 글과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슬며시 웃음도 나고 때론 뭉클하기도 하다.

글. 이정은 사진. 전재호








누군가는 마침표라고 생각하는 나이일지도 모를 일흔한 살에 4B 연필을 쥐고 그림을 그렸다. 학창 시절 이후 처음 잡아본 연필이지만 왠지 익숙했다. 그림을 배우러 가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설레기까지 했다. ‘한국의 모지스 할머니’로 불리는 이재연 작가는 그렇게 그림과 인연을 맺었다. “한국전쟁 후라 먹고살기도 힘든 시절이었어요. 게다가 아들 셋과 딸 여덟 중 일곱째 딸이니 대학은 언감생심, 고등학교도 눈치 보며 간신히 다녔지요. 조폐공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결혼한 후로는 줄곧 누구 아내, 누구 엄마, 누구 할머니로 살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큰며느리가 문화센터나 도서관에서 배울 게 많다며 다녀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육이를 키울 화분을 만들고 싶어 도자기를 배웠어요. 그러다가 그림 동아리가 있는 걸 보고 도자기에 그림을 그릴 욕심으로 그곳에 들어갔지요.” 이재연 작가는 그곳에서 새 세상을 만났다. 한번 빠져드니 그리고 싶은 것도 많아졌다. 처음에는 다육이를 주로 그리다가 꽃과 풍경도 그리고, 사람도 그렸다. 기법을 배우기 위해 평소 좋아하던 김홍도, 박수근 그림도 베껴 그렸다. 그렇게 그림에 흠뻑 빠져 살던 중 우연히 교하도서관에서 진행한 ‘기억의 재생’이라는 자서전 프로그램에 참여해 글 대신 그림을 그렸는데, 그걸 보고 소동출판사에서 그림책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해왔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은
60여 편의 글과 그림
“겁도 났지만 욕심도 나더라고요. 평생 존재감 없이 이렇게 살다가 가는구나 싶었는데, 이재연이라는 이름 하나는 남기고 가겠구나 했지요. 그래서 밤낮없이 그렸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릴수 록 어린 시절의 기억이 더욱 또렷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렇게 2년 동안 그린 60여 편의 그림과 글을 모은 <고향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가 출간됐다. ‘그림으로 들려주는 할머니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이 책에는 가래떡 뽑던 날, 목화솜 광목 이불, 초가집 참새 잡기, 눈썰매 타는 겨울 놀이, 정월 대보름 쥐 불놀이, 처음 본 전차 등 어린 시절 고향 이야기를 풀어낸 그림과 짧은 글이 설날부터 겨울, 봄, 여름, 가을 시간순으로 담겨 있다. 손주를 키우며 다육이를 기르던 할머니는 2019년 그림책 출간 이후 유명 인사가 됐다. 북 콘서트며 강좌 초청, 전시회 등 예전에 생각지도 못한 일상으로 하루가 바쁘고, 그림책도 5쇄를 찍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이 여세를 몰아 그림책을 더 출간할 계획이다. 6년 전에 얻은 늦둥이 손주의 성장을 글과 그림으로 5년 동안 한 장 한 장 그린 것이 수십권에 이르는데, 이것과 고향인 유성의 온천장 그림 시리즈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온천장에 갔다가 유황 냄새 때문에 쓰러진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이 너무 그립고 어머니도 그리워서 그렸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미국의 모지스 할머니처럼
100세까지 그리고파
“자녀들 출가시키고 나면 시간이 많아요. 저는 주변분들에게 이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말고, 뭐가 됐든 배우고 즐겨보라고 말합니다. 그림도 좋아요. 소질이 없더라도 낙서를 하듯이 생각나는대로 그리면 되거든요. 치매 예방에도 좋다네요.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손주 교육에 좋은 것 같아요. 본보기가 되잖아요.”



이재연 작가는 “노인들은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나오기가 힘들다” 며 “일단 나오기만 하면 이것저것 할 것이 많으니 그 물꼬를 젊은 사람들이 터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며느리 덕분에 세상으로 나온 자신처럼 말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는 이재연 작가. 고향과 부모, 형제자매, 지나온 세월…. 이런 걸 다 그리고 싶은데,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꿈속에서도 그림을 그릴 정도로 열정적이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아흔 살, 백 살까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모지스 할머니처럼 말이다. 모지스 할머니는 일흔여섯살에 고향인 농촌 풍경을 그리기 시작해 여든 살에 첫 전시를 열고 백한 살에 세상을 떠난 미국의 국민 화가다. 우연히 발견한 재능에 열정의 시간이 쌓이면 그 어떤 재능보다 뛰어나고 아름답다. 아직은 ‘작가님’이라는 호칭이 어색하다며 소녀처럼 수줍게 미소 짓는 이재연 작가와 그의 작품이 아름다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