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우리말 전도사
정재환

개그맨, 대학교수, 역사학자.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이 조합의 주인공은 한글문화연대 정재환 대표다.
개그맨과 방송 진행자로 이름을 날리던 그가 30대 중반에 한글 사랑에 빠져 우리말과 글을 살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3년 전 수원 화성행궁 부근에 문을 연 북 카페 ‘봄뫼’ 주인장이기도 한 정 대표를 만나 우리말 사랑에 대해 들어보았다.

글. 이선민 사진. 전재호

수원 화성행궁에서 외진 골목길로 들어서서 걷다 보면 ‘봄뫼’라는 이름의 북 카페가 나온다. ‘봄’과 산이라는 뜻의 우리말 ‘뫼’를 합친 이곳의 주인장은 정재환 대표다. 1980년대 인기 프로그램 <청춘행진곡>을 기억하는 이라면 반가울 테지만, 2000년대 이후 방송만 본 젊은 층에는 낯설 수도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한글이나 우리말에 관심 있는 사람은 그의 이름을 들어 봤을 것이다. 방송인에서 우리말 전도사로 활발하게 활동하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평소 대화할 때처럼 대충 말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어요. 그래서 국어책을 수집하면서 열심히 읽기 시작했고, 책을 읽다 보니 한글 사랑에 빠져 우리말 살리는 운동을 하게 된 거죠. 또 이러한 운동을 하다 보니 한글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어서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 들어가 13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그는 2000년 ‘한글문화연대’를 결성해 우리말·글 사랑 운동에 뛰어들었으며, 현재까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박사 학위 이수 후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한글문화연대 한국어학교 교장, 한글학회 연구위원 등 우리말 전문가로 불리기에 손색없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봄뫼가 위치한 곳은 나혜석 생가 터로, 그가 수원에 자리 잡은 것도 존경하는 나혜석의 생가가 있던 곳이라 주저 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을 위해 만든 세계 유일의 문자, 한글 정 대표는 한글 운동이 단순히 글자에 국한되지 않고 한글과 관련한 모든 것이라고 했다. 그가 결성한 한글문화연대의 활동 역시 우리말과 문화까지 아우른다.
“사람들이 한글이 어렵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어려운 것은 한국어겠죠. 한글은 한국어를 표기한 문자예요. 스물네 글자만 익혀서 조합 하면 어떤 말도 만들 수 있으니 배우기 어렵지 않고, 쓰기도 편해요. 한국어는 띄어쓰기, 맞춤법 등을 지키는 것부터 한국 사람의 정서와 문화까지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거예요.”

정 대표는 몇 년 전 아이들의 국어 실력을 키우기 위해 한자 열풍이 분 적이 있었는데,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기 위해 라틴어부터 배우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며 반문했다. 어려운 한자를 배우기보다 한글을 많이 쓰고 대화를 많이 해 어휘력을 키우는 것이 더 낫다는 이야기다. 왕만두의 경우 한자 임금 왕 자는 몰라도 왕이라는 단어에 크다는 뜻이 담겼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얼마 전 ‘심심한 사과’에서 ‘심심한’의 뜻을 두고 소동이 있었어요. 젊은 사람들이니 그걸 몰랐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 말을 한번만 들으면 다음부터 알게 되죠.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한 것과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한 ‘심심’이 다르다는 것을요. 그 단어를 아는 사람들도 한자로 써보라고 하면 잘 못 쓸 겁니다. 하지만 뜻은 알죠. 이처럼 한자를 많이 알아야 우리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듣고 쓰면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겁니다.”
정 대표는 보통 사람을 위해 역사 최초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만든 문자가 바로 훈민정음이라며, 해방 이후 한글 세대가 탄생했기에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거쳐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누구나 한글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쉽게 습득함으로써 대한민국 국민 개개인 모두 산업을 견인하는 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올바른 우리말 쓰기는 외국어 오남용 방지로부터 정 대표는 시대에 따라 언어도 변한다며, 요즘 청소년을 비롯해 젊은이들이 축약어를 쓰는 것에 대해서도 너무 불편하게 생각할 것 없다고 말했다.
“축약어 중에 ‘밀당’이라는 말이 있어요. 밀고 당긴다는 뜻인데, 이젠 모두가 밀당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흔하게 쓰는 우리말이 됐어요. ‘훈남’이라는 말도 의미가 확 와닿잖아요. 이런 축약어는 우리 말에 좋은 영향을 미치면서 자리를 잡을 수도 있고 사라질 수도 있어요. 시대가 변하고, 그에 따라 표현해야 할 새로운 말이 많이 필요한 세상이에요. 신조어를 만들 때 가능하면 우리말을 많이 쓰도록 고민해야 합니다.”
정 대표는 축약어보다 지나친 영어 사용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노쇼(no show)’라는 말 대신 한글 단어를 만들면 좋지 않겠냐는 것이다. 요즘 뉴스에서 자주 언급하는 ‘자이언트 스텝’, ‘빅 스텝’이라는 말 대신 ‘광폭 조정’, ‘대폭 조정’이라는 한글을 쓰면 좋겠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방송이나 신문 등에서 지나치게 영어를 많이 씁니다. 얼마 전 10·29 참사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CPR’이에요. 솔직히 전 CPR이 뭔지 몰랐어요. 그런데 ‘심폐소생술’이라고 하면 확실히 알겠더라고요. 아무리 급박해도 굳이 CPR이라는 말을 써야 하는지 의문이 들더라고요. 대중에게 영향을 많이 미치는 언론에서 우리말을 좀 더 쓰려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일찌감치 영어 대신 우리말을 쓰기 위한 새말 모임에서도 활동했다. 그가 만든 영어 대체어는 ‘파이팅’ 대신 ‘아리아리’, ‘마우스’ 대신 ‘쥐돌이’ 등이 있다. 정 대표는 경기도가 앞장서서 우리말을 썼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관공서에서도 캠페인을 펼칠 때 영어 표현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다고.
“예를 들어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라고 흔히 쓰는 단어가 있잖아요. 단순하게 쓰레기를 줄이자고 할 수도 있고, 우리말에서 더 그럴듯한 단어를 찾아볼 수도 있는데 굳이 영어를 쓸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훌륭한 한글을 올바로 사용할 책임이 공공 기관에도 있습니다.”
끝으로 정 대표는 경기도민으로서 경기도에 도움 되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11월 20일 봄뫼에서 자신이 소장 한 책 일부를 판매하는 행사를 연 것도 그 일환이다. 이 행사를 통해 얻은 수익금을 경기도 청년 양성을 위한 비영리 교육 단체 ‘홍재학당’에 기부할 예정이다. 현재 봄뫼가 있는 곳이 나혜석 생가 터라 주저하지 않고 이사했다는 정 대표. 한글·역사학자로서 수원 화성행궁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는 그가 경기도민과 함께 할 일을 많이 만들어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