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어지러이
발걸음을 내딛지 말라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러이 발걸음을 내딛지 말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뒤에 오는 사람의 길이 되리니.”
아직 아무도 걷지 않은 하얀 눈길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고요해진다.
눈이 내려 더 아름다운 곳, 그래서 겨울 낭만 가득한 곳. 경기도의 설경 속으로 들어가본다.

글. 이정은 사진. 전재호, 경기관광공사

왕릉의 겨울, 텅 빈 충만 하얀 눈으로 소복이 덮인 봉분은 엄마 품처럼 포근하고 평화롭다.
어느 문인이 말했듯이 상석 위에 쌓인 눈은 백설기처럼 푸짐해 빈손, 빈 마음으로 온
부끄러움을 덮어준다. 드넓은 왕릉은 텅 빈 것 같지만 충만하다.
왕의 위엄과 기운이 서려서일까. 호젓한 왕릉에서 텅 빈 충만을 얻는다.
동구릉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고요하다 못해 시간까지 멈춘 듯 겨울의 강은 모든 것이 멈춰 서 있다. 강물이 멈추니
돛단배도 발이 묶였다. 언 강 위로 살포시 내린 눈은
고요하다 못해 시간까지 멈추게 한 듯하다.
그 적막을 얼음 지치는 소리가 깨운다. 만국기 펄럭이는
얼음 썰매장에서는 아이도 어른도 동심이다.
손발 꽁꽁 얼어도 마음 한구석에는
따스한 모닥불이 피어오른다.
두물머리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 770-4

북유럽의 숲인 듯 눈으로 덮인 겨울 산은 백과 청, 단 두 가지 색깔만 입는다. 참 맑은 풍경이다.
새하얀 눈꽃을 보면 마음마저 절로 정화되는 한편,
묵직한 울림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빽빽한 잣나무 위로 눈이 하얗게
내려앉은 풍경은 마치 북유럽의 어느 숲을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아름답다.
축령산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축령산로 299
중미산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중미산로

산과 호수가 빚어낸 한폭의 수묵화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에 하얀 융단이 깔려 있다.
물의 자취를 모두 감추고 눈의 호수로 탄생한
겨울 호수는 맑다 못해 시리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포근하고 평온하다. 명성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망봉산과 망우봉을 거느리며 산 가운데 자리한
우물 같은 호수이기 때문이리라. 호숫가를 걷는 동안
안온하게 감싼 설산 자락이 한 점 수묵화 같은 풍경을
그리며 담담히 겨울 손님을 맞는다.

산정호수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산정호수로411번길 108

소리 없이 정갈하게 산 사에 눈발이 분분하게 흩날린다. 빛바랜 단청, 오래된 흙담,
600년 기운으로 소원을 이뤄준다는 은행나무, 그리고
세상의 모든 소리까지 깊은 적막 속에 가라앉는다. 고요한 산사에
내리는 눈은 마음의 동요를 잠재우고, 안정과 평화가 깃들게 한다.
쌓인 눈 사르르 녹아드는 고즈넉한 산사에선 욕심도 근심도 내려놓는다.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음을 알기에.
신륵사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