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1910년 조선을 병합하면서 우리 민족 말살을 위한
강압적인 무단통치와 토지조사사업 등을 통해 전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였다.
이에 일제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전민족적인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3월 상순에 이르러 13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중 경기도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치열하게 만세시위를 벌인 지역이었다.
정리. 편집실
참고. 일제의 식민지정책과 경기도((사)기전역사문화서포터즈, 2020)
1919년 3월부터 3개월간의 운동의 추이를 살펴보면 경기도와 경성부의 합계 횟수가 415회이다. 경성부의 31회를 제외하면 경기도는 384회로, 이는 경기 지방에서 가장 열심히 운동이 전개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특히 고양군, 개성군, 양주군, 장단군, 강화군, 시흥군, 수원군이 격렬했다. 처벌자의 숫자가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전국의 지역별 탄압 수치에 관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총 776건 중에서 경기도가 256건으로 전체의 33%를 차지하였다.
또한, 경기 지방의 항일운동은 한국독립운동 각 영역에 걸쳐 빠짐없이 전개되었다.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을 거쳐 3·1운동 후에는 정치적으로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사회경제적으로는 농민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 학생운동, 소년운동, 물산장려운동, 협동조합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수원·인천·개성을 중심으로 민립학교들의 민족교육을 비롯한 문화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곳이 경기도였다.
벽화로 남겨진 이정근 선생과 발안장 3·1운동 / 출처 : 화성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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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안 지역에서는 발안 장날인
1919년 3월 31일을 기해
1,00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했다. 이정근은 이날 시위에
참여한 남성들에게 흰 갓을 쓰거나
기존의 갓에 흰 천을 두르게 했다.
흰 갓, 백립은 3월 초 승하한
고종황제를 추모하는 의미였다.
1982년 제암리 발굴 현장 / 출처 : 경기도
가장 치열했던 경기남부의 독립운동
지금의 수원시, 오산시, 화성시 인근을 모두 포함하는 옛 수원군의 3·1운동은 전국에서 가장 치열하게 벌어졌다. <경기도 항일독립운동사>(1995)에서는 수원군의 3·1운동에 대해 ‘3·1 독립전쟁’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했다고 썼다. 실제 상해 ‘독립신문’은 수원의 3·1운동 시위대를 ‘독립군’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특히, 일제의 제암리 학살은 이 지역 운동의 치열함과 일제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사건인데, 이 사건의 단초가 된 것이 발안장 시위였다.
수원·화성 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은 송산·사강 지역, 우정·장안 지역, 발안 지역으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발안 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을 이끈 인물이 이정근이다. 발안 지역에서는 발안 장날인 1919년 3월 31일을 기해 1,00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했다. 이정근은 이날 시위에 참여한 남성들에게 흰 갓을 쓰거나 기존의 갓에 흰 천을 두르게 했다. 흰 갓, 백립은 3월 초 승하한 고종황제를 추모하는 의미였다. 시위 군중들은 만세를 소리높여 부르며 행진하면서 길가의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졌다. 이정근은 시위대를 이끌며 맨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수비대장 사이다(左板)가 칼을 들고 이정근의 복부를 내리치자, 이정근은 흘러내리는 피를 손으로 받아 수비대장의 얼굴에 뿌리면서도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결국 일본 수비대장의 칼에 이정근은 63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이후 정부는 이정근의 공적을 기려 1991년에 애국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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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안장 시위에서 확산된 제암리 학살 사건
당시 수원군 중 현재 화성 지역은 일제강점기 다른 어느 지역보다 강렬한 독립 투쟁이 벌어진 곳이다. 지역 주민들은 일제의 통치기구인 면사무소와 헌병 주재소를 표적으로 삼았다. 발안장 시위에서 이정근을 비롯한 주민들이 일제의 칼에 목숨을 잃으면서 주민들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 이때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 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왔다. 주모자들의 대대적인 검거로 만세 시위가 잦아드는 듯했지만, 시위는 계속되고 있었다. 아리타 중위는 발안장에 또다시 모인 군중이 제암리에 있는 예수교·천도교인이라는 첩보를 듣고 부하 11명과 일본 순사, 순사보를 대동해 제암리로 향했다. 그는 당시 인근에 거주하는 일본인 사사카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내세워 제암리에 사는 성인 남자들을 교회에 모았고, 오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직접 찾아가 교회로 모이게 했다. 천도교 전교사 안종환은 일본의 검은 속내도 모른 채 어린 아들을 안고 교회당으로 들어갔다가 함께 무참히 살해됐다. 아리타 중위는 학살이 끝나자 교회에 짚더미를 던지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일본군의 학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건너 마을인 고주리로 가서 집에 있던 일가족 6명을 모두 산 채로 태워 죽이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이 일은 커티스, 테일러, 언더우드 등의 선교사에 의해 알려지게 된다. 학살의 주범인 아리타 도시오는 해당 사건을 은폐하려고 시도했으나, 그해 7월 국제적인 여론에 떠밀려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하지만 재판부는 학살을 자행한 아리타 중위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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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아픈 역사
해방이 되기 전까지 제암리 사건은 언급조차 될 수 없었다가 1959년 4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려지며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로 된 순국 기념탑을 세울 수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청사)을 철거하는 등 일제 잔재 청산 및 복원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제암교회도 재복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1997년에 문화재관리국 주도로 제암교회 복원 및 새로운 3·1운동 순국유적기념관 건축 사업이 추진되었고 1만7천여㎡의 제암리 성역단지 내에 1,300여㎡ 규모의 새로운 순국기념관, 23인 순교묘지, 상징조형물 등이 조성되어 2001년 3월 1일에 완공되었다. 현재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제암교회에서는 영상물과 교육자료 등을 통해 제암리 학살 사건 당시의 내용을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제암리 학살과 방화 현장 / 출처 : 화성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