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탈 것의 변화
시대별 대중교통 변천사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했던 서민의 발
대중교통의 변천사를 알아보자.

글. 김영은


1899년~1968년


시민의 발이 된 ‘전차(電車)’ 우리나라 대중교통의 시작은 1899년 5월 20일, 한성(서울)에서 전차가 운행되면서부터다. 그보다 앞서 나룻배, 인력거 및 가마와 같은 형태의 운송수단이 존재했지만,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를 왕복하는 노면전차의 운행이 최초의 공식적 서비스로 인정받고 있다. 전기의 동력을 빌려 운행하는 전차는 당시 신문물로서 이는 표면적으로 고종과 황실의 홍릉 참배 행사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대한제국 시절 전력 공급을 목적으로 세운 ‘한성전기주식회사’의 전기 사업 확장을 꾀하기 위함에 그 목적이 있었다. 미국 기술자의 힘을 빌려 1899년 첫 개통된 전차는 같은 해 9월 18일에는 제물포-노량진 구간을 연결하는 지역 간 철도가 개시되는 등 노선의 다양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점차 늘어나는 적자를 감당하지 못한 ‘한성전기주식회사’는 결국 미국 회사에 매각되고 경술국치 즈음에는 일본 회사로 넘어가 이름도 ‘경성전기주식회사’로 바뀐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이를 토대로 서울 강북 주요 지역은 물론 한강 이남의 영등포까지 노선을 확장했고, 전차 선로 부설을 이유로 경복궁 담장을 허물고, 창덕궁과 종묘 사이에 노선이 지나가도록 하는 등 조선의 궁을 파괴했다. 당시 전차는 양반이 타는 상등 칸과 일반 백성이 타는 하등 칸으로 나뉘어 있었고, 한 칸에 40명가량 수용 가능했으며 정해진 정차장 없이 승객의 요구에 따라 타고 내렸다. 인도와 전차선로의 명확한 구분이 없이 운행하는 전차는 이로 인한 사고도 왕왕 발생하였는데, 5살 아이가 종로에서 길을 건너다 전차에 치이는 일이 있었고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통사고로 기록됐다. 해방 후에도 서울의 전차는 여전히 시민들의 발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점점 늘어나는 인구는 대중교통의 확충을 필요로 했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요금에도 불구, 사용 연한을 훌쩍 넘긴 낡은 열차와 느린 속도는 전차의 시대에 종언을 고했다.

1899년

경인선 개통과 함께 도래한 ‘기차’ 우리나라 철도역사는 1899년 9월 18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노량진~ 제물포 간 33.2km)의 개통과 함께 시작되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1896년 3월, 미국 상사 대표인 모스에게 경인철도의 부설권을 주었다. 하지만 자금 조달에 실패, 철도부설권은 그해 12월 대륙 진출의 야망을 품은 일본에 넘어가게 되고, 1899년 9월 18일, 제물포(인천)-노량진 간 33.2km 구간의 영업을 개시했다. 경인철도회사는 이날 인천역에서 ‘경인철도 개업예식’이란 이름을 걸고 첫 개통식을 거행했다. 미국에서 들여와 인천공장에서 조립한 모굴 증기기관차가 우렁찬 기적소리를 울리며 인천역을 시작으로 유현역(현재 동인천역)-우각현역(1905년 폐쇄)-부평역-소사역(현재 부천역)-오류동역, 그리고 노량진까지 7개 역을 왕복했고, 이후 한강철교가 완공되면서 첫 개통식 1년 뒤인 1900년 7월, 용산역-남대문역-서울역 구간이 개통된다. 이후 1905년 1월 1일에는 경부선(서울~부산)이 개통됐고, 이듬해인 1906년 4월 3일에는 서울에서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이 개통되었으며 1908년 4월 3일에는 부산에서 신의주간 직통급행열차가 운행됐고, 이후 호남선(대전~목포), 경원선(용산~원산), 충북선(조치원~충주) 등이 차례로 개통됐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비둘기호와 통일호 열차는 아득한 옛이야기가 되어 향수를 자극한다. 1967년 개통되어 2000년 11월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 철도계의 최하위 등급 열차, 완행열차인 비둘기호는 일단 지나가는 길에 존재하는 역이란 역은 모두 다 정차했다. 열차표에 펀치로 구멍을 내며 검표하는 승무원 아저씨, 어수선하고 혼잡한 객실 안은 선반마다 커다란 짐꾸러미가 가득했으며 따로 금연구역이 없던 실내는 희뿌연 연기로 자욱했다. 미처 열차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타인의 좌석 팔걸이에 걸터앉거나 통로에 기대있던 시절, 7~80년대의 비둘기호는 그 당시 많은 사람에게 삶과 희망이었으며 오늘날 옛 추억과 낭만을 선사하고 있다.

1912년

1912년, 도로 위의 홍반장 ‘버스(BUS)’ 지하철이 생기기까지 버스는 우리나라 유일한 대중교통으로 존재했다. 1912년 최초의 도시 간 버스운송사업 이후 시내버스는 1920년 7월 1일, 대구에서의 운행이 최초로 기록된다. 당시 방직 산업이 발달했던 대구에 인구가 몰리자 한 일본 기업인이 시내버스 정기 노선을 설치한 것. 대구역에서 출발한 22인승 자동차 네 대가 시내를 다니며 승객을 태웠는데 정류장이 있긴 했지만, 도중에 손을 들어도 탑승할 수 있었다. 1928년 4월 22일에는 일본에서 들여온 22인승 마차형 버스인 ‘경성부영버스’가 서울 시내버스 서비스를 개시하였다. 요금은 7전으로 3전인 전차보다 갑절은 비쌌지만, 사람들은 최신 시설에 속도 또한 빠른 버스를 선호하였다. 다양한 크기의 차량으로 단거리뿐 아니라 중장거리 운행에 용이한 버스는 도로 위의 대표적인 대중교통수단이다. 1960년대 버스 위주의 교통 정책은 통학학생전용버스와 급행좌석버스를 도입했다. 그 시절, 서울에는 ‘버스비가 만 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생겨났다.

출퇴근 시간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들어찬 승객들로 발 디딜 틈 없는 상황을 빗댄 ‘만원 버스’를 오해한 것이다. 포화상태에서는 차가 출발해도 문을 닫을 수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럴 때 버스 안내양과 기사의 파트너쉽은 기지를 발휘한다. 탕탕! ‘오라이’ 외침에 구부러진 길이 아님에도 급히 꺾는 핸들은 차 안의 승객들을 한쪽으로 쏠리게 하고 그 순간 안내양은 재빨리 문을 닫는다. 1970년대 일반 시내버스 요금은 10원으로 현재 교통카드 기준 요금인 1,200원에 비하면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지금처럼 교통카드나 신용카드가 없던 시절 요금은 현금으로 지불했는데 과정에서 안내양들이 도둑으로 몰려 몸수색을 당하는 등 인권침해가 잇달았다. ‘토큰제’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1999년 9월, 플라스틱 교통카드 출현 이전까지 통용된다. 학생은 종이 승차권인 ‘회수권’을 사용했는데 이는 버스 요금뿐 아니라 매점이나 학교 분식집에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한편 1968년 경인고속도로와 1970년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은 고속버스의 등장을 이끌었다. 현재 ‘메리어트 호텔’ 앞 전차 차고지 자리에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이 들어섰는데 이는 1981년, 반포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 들어서기 전까지 서울역과 함께 도시의 관문을 맡았다.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개통


1974년 8월 15일, 서울역과 청량리역을 잇는 도시철도 1호선이 개통되었다. 바야흐로 지하철 시대가 도래 한 것. 이어서 1985년 7월 19일에는 부산지하철 1호선 1단계 노선이 개통되기에 이른다. 이는 경제 개발과 함께 늘어난 교통 수요를 감당하고자 추진된 대중교통 혁신 사업의 일환으로 서울 도시철도 1호선의 경우, 서울역부터 청량리역까지 9개 역 7.8km 구간을 5분 간격(출퇴근 시간 기준)으로 달렸다. 이후 인천, 경기, 충청 지역으로 노선을 확장, 1984~1985년에는 지하철 2, 3, 4호선이 1990년대에 5~8호선이 개통됐다. 74년 개통 당시 지하철은 천장에 설치된 선풍기와 낙창식(아래쪽으로 열 수 있게 설계) 창문의 자연환기방식으로 겨울과 여름을 달렸다. 요금은 30원으로 현재 교통카드 기준 1,250원에 비해 약 40배의 차이가 난다. 첫 열차는 일본 히타치중공업에서 들여온 교, 직류 겸용 저항제어 전동차로. 6칸을 한 편성으로 구성해 총 10개의 편성을 갖추었다. 크림색 바탕에 빨간색 창틀의 통근형 열차, 1세대 전동차는 역사적 상징성을 고려해 현재 신정차량기지에 보존 중이다. 한편 지하철 1호선 시청역 역무실 앞 벽면에는 황금색 글씨로 된 안내판을 만날 수 있다. ‘지하철 종로선 개통에 즈음하여’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글귀는 땅속을 뚫기 3년 4개월, 서울시민 교통에 신기원을 이룩할 지하철 종로선 완공에 대한 축하와 치하의 마음이 담겨있다. 당시 체신부에서는 역사적인 지하철 개통을 경축, 기념하고 국내외 널리 알리기 위하여 10원짜리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