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의 경기 백년 식당 우리밀로 옛 맛 이어가는
서삼릉 너른마당

뒤로는 백운대와 인수봉이, 바로 옆에는 서삼릉이
펼쳐지는 자연의 품 안에 너른마당이 깃들여 있다.
음식 맛도 자연의 맛을 닮았다.

글. 박찬일 사진. 전재호



서른에 어머니의 맛을 물려받다“내 나이는 묻지 마세요. 나도 몰라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노포니까 가게 나이는 알려줘도 주인 나이는 말하지 말란다. “늘 청년처럼 일하려고 해요. 초심대로 가자고. 그래서 나이를 안 세어봤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는 1950년생이다. 30대에 이 가게를 시작해 지금까지 끌고 왔다. 단정하면서 윤이 흐르는 가게다. 어디 하나 먼지 묻은 구석이 없다. 코로나19 시국에도 늘 만원이다. “점심 장사여서 코로나19 영향도 덜하다”고 겸손해하지만, 뭐가 있으니까 다들 오는 거다.
노포란 관성으로 손님을 끄는 것처럼 보인다. 노포니까, 오래되었으니까 간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필자가 그걸 알아내는 데 20여 년이 걸렸다. 우리나라 주요 노포를 거의 취재했다. 그렇게 나온 책이 두 권이다. 아, 다시 이 가게로 돌아가보자. 가게 뒤로 백운대와 인수봉이 보인다. 좋은 입지다. 자리가 좋아서도 손님이 어느 정도는 올 듯싶다. 게다가 음식까지 맛있으니 명소가 됐다.
오랫동안 원당으로 불리던 땅이다. 서삼릉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동네. 농협대학이 있고, 서울한양CC가 있는 곳이다. 찾아가려고 전철 원흥역에서 내려가려니, 마을버스가 낮에는 1시간에 한 대 다닐까 말까 한다. 걸었다. 훅, 끼치는 공기가 다르다. 개발 제한으로 오래 묶여 있는 동네인 까닭이다. 왕릉이 있고, 녹지가 넓다. “전에는 고양군 원당면이었어요. 이곳 토박이입니다. 운 좋게 식당을 시작했고, 오래 견뎌냈네요.”
이 말은 관리를 잘했다는 뜻인데, 음식도 잘한다. 빈대떡을 부치고 국수를 뽑는다. 음식 일은 사람을 쓰더라도 사장이 다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고전적인 식당론에 부합한다. 잘되는 집은 그런다고 하지 않는가.
“1989년도인가, 농사도 그렇고 어머니가 국수 끓여 팔자고 해서 집을 수리해 식당을 하게 됐어요. 여기서 농사짓고 살던 집안이에요. 자식들 농토 나눠주고 저랑은 가게를 한 거예요.”

이 지역이 개성 음식과 서울 음식의 전형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사실 개성과 서울 음식은 원래 닮았다. 거리도 가깝다. 각기 두 왕조의 수도라는 사실도 공통점이다. 하여튼 그의 식당 ‘너른마당’ 음식은 유순하면서 새침하며 정갈한 개성 음식과 서울 북부 지역 음식 사이 어딘가에 있는 맛이 맞는 것 같다.




“어머니(박길순)가 솜씨가 좋으셨어요.
2005년도에 91세로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가 제 처한테 주방을 물려주셨지요.
나야 주로 관리를 했지요.”

훈제통오리와 밀쌈의 조화 살던 옛날 집을 수리했다. 사랑방, 광, 외양간을 손님방으로 만들 었다. 살림을 하면서 손님을 받았다.
“뭐 허가랄 것도 없었어요. 무허가가 많을 때였으니까요. 장사가 잘됐어요. 어머니 솜씨대로 손으로 칼국수 밀고 빈대떡 부치고 토종 닭도 팔고 그랬지요. 아주 인기가 좋았어요.”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있다. 이 집의 주메뉴는 우리밀을 통으로 제분해 만든 칼국수인데, 원래는 지역의 밀가루를 썼다고 한다. 지금은 거대한 신도시가 들어섰지만, 한강 변은 원래 행주산성 일대부터 일산을 지나 임진강으로 합류하기 전까지 농토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밀을 꽤 길렀다고 한다. 우리밀은 1990년대 남도에서 다시 재조명받기 시작하면서 재배량이 늘 었지만, 오랫동안 국수 재료는 수입 밀가루가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한강 변에서 더 이상 구할 수 없지만, 그가 여전히 우리밀을 고수하는 것도 그런 옛 맛을 지키는 과정이다.

“국수랑 빈대떡 말고도 손님들이 고기를 원했어요. 어머니가 꿩, 오리 같은 걸 당신이 직접 양념해 손으로 주물러서 구워냈지요.” 일종의 오리불고기, 꿩불고기였다. 그때 꿩을 기르는 붐이 일어서 그도 손을 댔는데, 막상 팔 곳이 없어 가게에서 구워 팔다가 접었다. 지금은 오리를 훈제해서 판다.
“어머니 불고기 양념이 지금 흔한 것과는 달랐어요. 간장에 고치장 풀고 뭐 양파, 마늘 같은 걸 섞어 만드셨지요.”
고치장, 즉 고추장을 넣은 양념이다. 진간장, 즉 일종의 왜간장이 지금 식당 불고기의 기본양념이다. 예전에는 고추장을 넣고 집간장으로 간을 하던 불고기 방식이 있었다는 건 너른마당 음식 역사의 중요한 대목일 수 있겠다.
음식 평론의 원조 백파 선생이 극찬한 맛 필자가 이 집을 알게 된 건 사연이 있다. 평소 모시는 선배인 박영수 선생(노포 ‘동신면가’ 주인)에게 부탁을 드렸다.
“경기도 노포 좀 소개해주십시오.”
“아, 있죠. 너른마당 임 사장에게 전화해보세요.”
그리하여 취재를 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백파가 등장한다. 이른바 음식 평론의 원조 격이 되는 소설가 홍성유(1928~2002)의 호가 백파다. 그는 소설가로도 유명하지만, 음식 평론으로 더 알려졌다. 그가 1990년대 주요 신문과 주간지에 연재하던 식당 소개글이 장안에 큰 화제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 도하 모든 언론이 지면에 식당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를 거쳐 현대로 넘어오면서 우리나라에도 음식 평론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대중적 인기는 하여튼 백파가 시작이다. 인기를 넘어 파괴력이 있었다. 그야말로 메가톤급이었다. 그 예가 바로 너른마당이기도 하다.
“박영수 선생이 그때 백파 선생을 모시고 많이 다니셨어요. 박 선생이랑 여러 식당 주인이 모여서 백파 선생을 따르는 다담회를 할 때였어요. 같이 우리 가게에 오신다는 거예요. 백파 선생이 흡족하게 식사를 하시고는, ‘앞으로 소문을 낼 테니 열심히 하시게’ 하고 가셨어요.

그러고는 어느 날이었어요. 밖에서 볼일을 보고 가게에 돌아가는데, 이 옆에 농협대학 앞까지 뭔 줄이 아주 길게 늘어선 거예요. 뭔 일이 났나 했지요.
알고 보니 우리 가게에 선 줄이더라고요. 한 1km는 되었을 겁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수요 미식회>니 백종원이 진행하는 인기 프로그램에 나간 것보다 훨씬 영향력이 컸다. 그때 백파의 식당 소개는 그냥 ‘2등이 없는 단독 1위’의 파워였다.
“백파 선생이 이런 말을 했어요. ‘자네, 이제 장사 잘되면 식당 일 말고도 취미 생활을 할 텐데 골프는 치지 말게’ 하시는 거예요. 무슨 말인가 했는데, 골프가 워낙 재밌어서 빠지면 식당 일에 소홀 해진다는 경고였어요.”
백파 선생의 당부대로 그는 골프 안 치고 한눈 안 팔고 식당에 전념했다. 취미는 고작 자전거 타기다. 2008년, 원래 가게 자리가 택지 개발이 되어 보상을 받고 나왔다. 장사를 그만둘까 하다가 그래도 천직이라 생각했다. 근처에 너른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100년 가는 식당을 하려고 단단하게 올렸다. 가보면 알겠지만, 얼렁 뚱땅 지은 집이 아니다. 나무도 단단하고 기운도 좋다. 통유리 창으로 밖을 보면서 너른 탁자에서 식사를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다. 아, 이 집의 우리밀칼국수는 국물 맛이 신묘하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맛이란다. 다시마를 많이 넣는 것이 비결이다. 참, 가게 앞에 큰 비가 있다. 고구려 광개토왕비다. 중국 현지에 있는 비를 완벽하게 복제 제작해서 한국으로 들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