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수택동의 보물 추어탕 노포, 충남식당

기력이 없을 때 보양식을 찾는 게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이다.
그중 추어탕은 서민의 대표 보양 음식.
구리시 수택동에 보물 같은
추어탕 노포, 충남식당이 있다.

글. 박찬일 사진. 전재호



추어탕은 기름기 귀한 시기에 소중한 음식이었다. 동네에서 손쉽게 구해 된장, 고추장을 풀어 끓였다. 만들기 쉬워 참 많이 먹는 음식이었다. 한때 노포 중에 유달리 추어탕집이 많았는데 이젠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늦더위가 맹렬하던 날, 구리시 수택동의 귀한 추어탕 노포를 찾았다. 연세보다 한참 젊어 보이는 권옥순(75) 대표 부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침 가게는 만석. 주로 나이 지긋한 분들, 특이하게도 여성 손님이 많다. 한 분께 여쭤보니 단골이란다.
“맛있고 깔끔해요. 여기는 단골 장사예요.”
그 단골의 말이다. 과연 그럴까? 한 그릇 청한다. 첫술에 훅, 눈이 번쩍 뜨인다. “어라?” 이런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맛있다! 첫술은 감칠맛 나게 당기고 뒷맛은 깊다. 추어탕 제대로 골랐다.

Since 1973, 잊지 않고 찾아오는 단골손님 내년에 이 집은 개업 50주년을 맞는다. 상당한 내력의 노포다. 경기도 구리시는 서울 동부권을 떠받치는 베드타운으로 개발되었다. 사람이 모이고 흩어지는 일이 잦은 반면에 원래부터 토지 비옥한 구리에 살던 토박이를 아우른다. 도농 복합 지역이란 뜻이다. 이 집을 찾는 오랜 단골 상당수가 구리·남양주 토박이다. 이 대목이 아주 흥미롭다.
“서울에서도 많이 오시지만, 이 동네 사시는 양반 중 단골이 많아요. 동네 장사가 쉬운 게 아니에요.”
상호는 남편의 고향을 따랐다. 권 대표는 충북 사람이다.
“충청도는 추어탕이 유명한 것 같지 않아요.(웃음) 민물 매운탕 같은 걸 잘하니까요. 어쩌다 이걸 하게 됐네요.”
신혼 생활을 면목동에서 시작해 아이 낳고, 살림을 늘리고, 가게를 하다가 개발하는 바람에 가게를 옮겨야 했다.

이때 눈에 들어 온 곳이 구리시인데, 아는 이가 이 근처에서 쌀가게를 했기 때문이다. 작은 인연에 움직이는 것이 이주민의 마음이다. 이들 부부는 충청도 사람이고, 서울서 자리 잡았는데 구리시 시민이 되었다. 인연이란 게 그렇다.
“면목동에서 팔던 대로 순댓국 만들고, 육개장도 하고 그랬어요, 평범한 한식당이었죠. 그러다가 추어탕을 시작했는데, 이게 유명 해진 거예요.”
권 대표는 어려서 동생이 아팠다고 한다. 그 시절 변변히 쓸 약이 있었겠는가. 아버지가 미꾸라지 잡아다가 푹 고아서 먹였는데, 동생이 일어났단다. 권 대표는 그게 추어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보양도 되고 맛도 좋다. ‘추어탕을 팔자!’ 그렇게 시작했다.
추어탕은 손질에서 시작해 손질로 끝난다. 내장의 흙을 다 게워 내도록 해야 하고, 냄새 안 나게 잘 삶아야 한다. 들어가는 채소도 중요한데, 추어탕에는 대개 우거지를 쓴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한 보따리나 되는 우거지를 권 대표와 일 돕는 아주머니가 다듬고 있다. 우거지 다듬는 일, 이거 보통 아니다. 손끝으로 얇은 막을 다 벗겨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질기다.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들지 않는가. 여기에 적절한 양념이 배합되어야 한다. 이런 수고가 이 집 추어탕의 시원하고도 그윽한 맛을 결정한다.
“장이 중요해요. 맛이 가벼우면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무거워도 안 돼요. 재료 좋은 거 쓰는 게 다예요.”
충남식당은 노포답게 ‘통마리’도 된다. 통마리란 추어가 보이도록 갈지 않고 통째 넣어 끓인 거다. 원래 추어탕은 지역별로 특징이 있는데, 범경기권에서는 통마리로 끓이는 집이 많다.
“미꾸라지를 갈지 않고 통마리로 하면 좀 어려워요. 그래도 찾는 분들이 있으니까 내지요. 보통은 갈아서 만든 걸 드시지요. 통마리는 찾는 분이 점점 줄어요.”
통마리는 한 그릇으로 먹는 뚝배기에 주문 가능하다. 초피(산초)가루를 내는 건 본디 남쪽 지방 방식이다. 이제는 다 섞여서 지역 특색이 희미해졌다. 매콤하게 하면서 초피를 섞는 경상도식, 추어를 갈고 우거지를 넣어 구수하게 끓이는 전라도식, 여기에 소 곱창과 사골을 쓰며 통마리로 내는 경기식이 뒤섞여 팔리고 있다.

국산 추어의 시원하고 그윽한 맛 미꾸라지는 국산을 고집한다. 뼈가 억세지 않은지 크기도 잘 선별해야 한다. 오랫동안 쌓은 노하우가 노포의 힘이다. 튀김도 한 접시 주문해본다. 바삭바삭.
“원래 튀김 같은 걸 알기나 했겠어요? 이것저것 해보다가 알게 된거죠.”
만드는 걸 유심히 살펴보니 세 번 튀긴다. 순전히 공과 시간의 결과물이다. 바삭함을 살리기 위해서다. ‘동네 추어탕집이라고 만만히 보지 마라.’ 그런 말을 접시 위 튀김이 하는 것 같다.
“여기도 많이 바뀌었어요. 이 근처는 이제 젊은이들이 많이 몰리는 동네가 됐지요. 우리 같은 옛날 가게가 별로 없어요. 얼마나 오래 할지 모르겠어요.”
“연세보다 훨씬 젊어 보여서 오래 하실 것 같다” 했더니 웃으신다. 덕담만은 아니었다. 부부 금실이 워낙 좋아 보였고, 두 분 모두 낙관적 성격 같다. 이러면 여유가 있다.
“단골이 많고, 어르신들이 찾아오시니까 가게를 지키고 있는 거예요. 추어탕 하나 보고 오는 손님들인데, 헛걸음하게 하면 미안 하잖아요.”

충남식당은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활기찬 수택동 번화가를 지나 젊은이들 거리를 구경하면서 걸음을 옮기다 옛날 느낌이 나는 시장 골목으로 쑥 들어간다. 조용하면서도 풍취가 감돈다. 특히 골목 입구는 이미 ‘현대적’ 가게들로 새로움이 넘치는데, 가게가 숨어 있다시피 한 골목 안쪽은 또 잠시나마 시간을 거슬러가는 느낌이다. 노포는 ‘생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생물은 숨을 쉬는 존재를 뜻하는데, 실제 그런 기운을 받는다. 사람이 살고, 드나들고, 사연과 기억이 새겨지면서 생명을 얻는 것, 그게 노포다.
“이곳에서 가게만 하는 게 아니라 동네 사람으로 잘 살려고 했어요. 남편이 통장도 오래 하고, 봉사를 많이 했죠. 벌어서 생활하고 돌려줄 수 있는 건 돌려주자 했어요.”
양로원 봉사도 그렇게 시작했다. 어르신들에게 추어탕 한 그릇씩 대접한다. 말이 쉽지, 빤한 식당 살림에서 덜어내야 할 수 있는 일이라 쉽지 않다. 커다란 식당도 아니고 동네 골목에서 추어탕 팔아 무슨 여유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가게를 가득 메운 온갖 표창장, 감사장에서 권 대표 부부의 선행을 엿볼 수 있다. 이제 자식들이 식당을 이을까.
“글쎄, 아닐 거예요. 누가 추어탕 같은 옛날 음식을 먹겠어요. 우리 부부가 하다가 그만두는 거지요.”
아, 쓸쓸하다. 이 아름다운 가게가 없어질 수도 있다니. 그러나 다행스러운 건 두 분이 정정해서 오래 수택동 골목을 지킬 것 같다는 희망이다.
아직도 혀끝에, 입안 가득 추어탕 맛이 남아 있다.

박찬일
누군가는 ‘글 쓰는 셰프’라고 하지만 본인은 ‘주방장’이라는 말을 가장 아낀다.
오래된 식당을 찾아다니며 주인장들의 생생한 증언과 장사 철학을 글로 쓰며 사회·문화적으로 노포의 가치를 알리는 데 일조했다.
저서로는 <백년식당>, <노포의 장사법> 등이 있고 <수요 미식회> 등 주요 방송에 출연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