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도예의 역사가 된 경기 도자기

선사시대부터 시작된 경기도 도자공예는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일본 도자기의 시원이 되기도 했다.
세계 도자공예의 중심지로 나아가는
경기도 도예 문화와 역사를 살펴본다.

글. 이정은 사진. 경기도청, 장욱진미술문화재단










경기도는 고령토가 풍부하고,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해 운송이 편리한 지리적 이점 덕분에 일찍부터 도자공예가 발달했다. 신석기 시대부터 한강 유역과 서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토기를 제작했고, 고려청자도 시흥과 용인에서 처음 제작했다.
조선 초기에는 분청사기를 주로 만들었다. 분청사기는 고려 말 상감청자가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지방색에 따라 변모한 것으로, 16세기 후반 무렵까지 조선의 도자 문화를 풍성하게 일구었다. 이후 중국의 청화백자 영향과 유교 사회상이 맞물리면서 백자가 유행했다. 조선 왕실이 1467년경 관청과 궁중에서 사용할 고급 백자를 만들기 위해 경기도 광주에 관영 사기 제조 공장인 사옹원 (司饔院) 분원을 설치했을 정도였다. 광주에서 나는 고령토는 색이 희고 고와 백자를 만들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 그 결과 분원 가마인 광주 우산리·도마리·번천리·무갑리 등지에서는 당대 최 고 수준의 백자가 생산되었다. 광주 분원은 인근 지역인 이천과 여주에 있던 사기장에도 영향을 미쳐 관요의 고급 기술이 민간요로 자연스럽게 전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와 현대를 거치면서 일제에 의한 전통문화의 단절, 해방 이후 서구 문화 유입 등으로 전통 도예는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이후 현대에 이르면서 전통 도예의 재현, 기계화된 생산 체제 도입과 수공예 부흥, 그리고 요업 재편 과정을 통해 이천·여주·광주 일대가 전승 도자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여주는 백자 제작과 함께 생활 도자가 주류를 이룬 반면, 이천은 청자를 중심으로 한 전통 도자, 광주는 조선백자 중심의 전통 도자가 대표성을 띠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 교류에 가교 역할을 하는 도자기 선사시대부터 시작된 우리나라 도자 역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위기와 도약의 시대로 들어선다. 도자기 굽는 기술이 없던 일본은 수많은 도자기를 약탈한 것은 물론 도공들을 끌고 갔고, 이후 제작 인력과 자본이 부족해진 탓에 조선백자는 품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에 걸쳐 전쟁의 피해를 극복하고 문화가 부흥하면서 조선백자도 달항아리를 제작하는 등 황금기를 맞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도공은 80여 명에 이르렀다. 그중 심당길이 있었다. 심당길은 전라도 남원에서 의병 활동을 하던 20대 청년으로, 남원의 산천과 흡사한 가고시마 미야마라는 곳으로 이동해 함께 끌려간 도공들과 같이 명품 도자기 ‘사쓰마야키(薩摩燒)’를 만들어냈다. 사쓰마야키는 한국 도자기의 맥을 잇는 일본식 도자기로 ‘일본 최고 백자’라는 칭호를 받으며 일본 도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특히 심당길의 제12대손인 심수관은 사쓰마야키를 전 세계에 알리는 등 일본 도자기의 중흥을 이끌었다. 가업을 빛낸 심수관의 업적을 기려 후손들은 이름을 그대로 이어 쓰고 있는데, 포로로 끌려간 가문 중 지금까지 한국 성을 쓰고 있는 집안은 심수관가(家)밖에 없다.

제14대 심수관은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도예가다. 한일 문화 교류에 힘을 쏟아 1989년 한국 정부로부터 가고시마 명예총영사라는 직함을 얻었고, 1999년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지금은 제15대 심수관이 심수관가를 이끌고 있는데, 경기도 김일만 토기공장에서 김칫독을 제작하는 과정을 습득할 정도로 경기도 도자기에 관심이 많다. 최근에는 문화재청의 초청으로 방한했다가 청송 심씨 문중의 요청으로 424년 만에 김포시에 있는 선조들의 묘소를 참배하며 뿌리를 찾기도 했다. 제15대 심수관은 “‘한국인임을 잊지 말라’는 초대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지금까지 ‘심씨’라는 이름으로 도자기를 만들고 있다”며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너는 절대로 외로움을 느끼지 마라. 네 뒤에는 대한민국이 버티고 있다’ 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고 전했다.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한국과 일본의 친선을 위해 가교 역할을 하는 예술가가 되도록 더욱 노력하겠다”는 15대 심수관. 그가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는 미야마 마을의 심수관가에는 ‘대한민국 명예총영사’라는 현판과 함께 태극기와 일장기가 나란히 걸려 있다. 그리고 제14대 심수관이 남원에서 가져간 불씨가 지금도 꺼지지 않고 활활 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