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게, 현란하게!
거리의 예술가 빈울

누군가는 예술이라 하고, 누군가는 흉물스러운 낙서라고 한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낙서가 될 수도, 예술이 될 수도 있지만,
확실한 건 시대가 변하면서 도시 정체성을 만드는 새로운 거리 예술로 인정받고 있다는 점이다.
공공장소에 스프레이나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는 그라피티 이야기다.

글. 이정은 사진. 전재호






미군 문화가 주류를 이루는 송탄에서는 오래전부터 그라피티(graffiti)가 자연스러운 거리 예술로 인식되었다. 거리 곳곳에서 다양한 스타일의 그라피티를 만나볼 수 있는데, 그중 평택국제 중앙시장 뒤쪽에 있는 철길을 채색한 그라피티가 단연 눈에 띈다. 시장의 역사를 포함한 다양한 내용을 담은 이 벽화는 평택국제중앙시장의 랜드마크가 됐고, 포토 존으로 인기가 높다. 이 그라피티 작업을 한 사람은 평택시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는 그라피티 아티스트 빈울. 주말을 맞아 관광객과 동네 주민(외국인, 한국인)이 북적대는 기찻길에서 그를 만났다. Q 경기도에서는 이미 유명하시던데,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빈 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철수입니다. 그라피티 작가들은 본명 대신 태그 네임(tag name, 서명 이름)을 사용해요. 그라피티 자체가 불법적 활동이 많았기 때문에 본명을 쓰지 않았죠. 빈울은 ‘찬란하다, 현란하다’라는 뜻의 한자 이름입니다. 내·외적으로 조화를 잘 이루어 찬란하게 빛나고 싶다는 소망을 담았어요. 평택시 출신으로 이 지역의 아이덴티티를 벽화에 녹여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Q 언제부터 벽화를 그리셨는지,
계기는 무엇인지요?
20대에 서울 홍대 근처에서 10년 정도 살다가 평택시 송탄으로 내려왔는데,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송탄만의 매력이 눈에 띄더라고요. 송탄, 특히 미군 부대가 있는 이 신장동은 이태원보다 더 글로벌하고, 더 미국스럽습니다. 미국의 어느 도시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지요. 그런데 그런 장점들이 사라져가고 있더라고요. 안타까웠죠. 송탄의 특수한 도시 문화 콘텐츠를 보존·발굴하고 싶어 주변의 몇몇 문화 예술가들과 함께 거리 페스티벌 같은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라피티를 접하게 됐는데, 잊고 있던 어린 시절 화가의 꿈이 다시 떠오르면서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래서 취미로 시작했다가 푹 빠지게 됐죠. 벌써 7~8년 됐네요.

Q 주로 어떤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시나요? 고대 문자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타이포그래피를 만들어낸 ‘라틀라스(L’Atlas)’라는 작가가 있는데, 저도 그처럼 글자를 많이 이용합니다. 원래 저는 글자를 매우 좋아해서 1930~1950년대 뉴욕의 간판 같은 아날로그적 감성의 글씨가 좋더라고요. 그렇다 보니 작업도 스프레이보다는 붓을 더 많이 사용합니다. 벽이나 천에서 표현되는 붓의 질감이 글자의 감성을 더 잘 드러내는 것 같거든요. Q 대표적 작품을 소개해주세요. 기찻길에 작업한 ‘컬러풀 스트리트’ 프로젝트가 아닐까요. 미군 기지 오산에어베이스의 군사물자 수송 기능을 담당하는 평택선 일부 구간이 평택국제중앙시장 뒤쪽에 있어요. 김윤아·오피·이병찬 등 작가 3명 그리고 보조 작가 10명과 함께 평택선(경부선의 지선)의 88m 구간을 페인팅했죠. 송탄의 알파벳인 ‘SONGTAN COLORFUL STREET’를 익살맞은 필체로 적고, 다양한 인종과 톡톡 튀는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형형색색의 컬러를 사용했습니다. 비행기, 햄버거 등도 그려 넣었지요. 송탄이니까요. Q 지금 하시는 작업과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지난 2020년 경기문화재단의 지역 문화 자원 발굴 및 재생 공모 지원사업에 선정되면서 지역민과 예술인이 호흡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신장동에 만들었는데, 이곳을 ‘한치각’이라고 합니다. 한치각이란 건축에서 기본이 되는 목재인 ‘서까래’를 이르는 우리말이에요.

문화 예술의 가장 기본이 되는 공간이 되고자 하는 뜻을 담았습니다. 기찻길과 신장쇼핑몰 공영 주차장 프로젝트가 한치각 작품이죠. 현재는 경기문화재단에서 지원하는 ‘경기에코뮤지엄’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역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지역의 생태나 문화 자원을 보전하고 활용해 지역 발전에 기여하는 문화 예술 프로그램이죠. 저와 오피, 안민욱, 김종훈, 허창범, 이의석 등 6명의 작가가 참여해 중앙시장로 11번길 골목을 송탄만의 특색이 가득한 곳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라피티로 다 채우는 건 아닌 듯해서 여러 가지 콘텐츠를 계획하고 있어요. 일종의 공공 예술 형식으로요. 주민은 물론, 관광객이 쉴 수 있도록 군데군데 특색 있는 의자를 만들어서 설치하는 것이죠.

Q 평택시 송탄을 고집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송탄은 제 일부예요. 홍대에서 여러가지 경험과 커리어를 쌓고 자리잡게 된 곳이 송탄 신장동입니다. 이건 제 꿈인데요, 신장동 일대가 세계적 그라피티 성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뱅크시 같은 작가가 쭈그리고 앉아 그림도 그리고, 그게 SNS를 통해 전 세계로 송출되어 다들 부러워하고, 어깨에 힘 좀 준다는 작가들이 앞다퉈 이곳을 찾는 거예요. ‘내 작품 하나 정도는 이곳에 있어야지’ 하면서 말이죠. 그런 황당하지만 재미있는 꿈을 꾸면서 이곳에 살고 있답니다.(웃음)

빈울 작가는 “신장동은 미군과 함께 해온 독특한 문화를 지닌 전국에서 유일한 동네”라며 “역사를 기억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것을 문화와 예술로 기록하고, 지키고 싶다”고 한다. 이런 신념을 가진 지역 문화 예술인이 있기에 개성 있는 지역 문화가 꽃피는 게 아닐까? 송탄의 이야기와 삶의 흔적이 그라피티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피어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