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와 충절의 상징,
포은 정몽주 유적지

용인시 모현읍에는 ‘단심가’로 유명한 충절의 상징 포은 정몽주 선생 묘(경기도기념물 제1호)와
충렬서원(경기도유형문화재 제9호)이 자리해 있다.
용인시에서는 매년 ‘포은 문화제’를 열어 정몽주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고 있다.

글. 이정은 사진. 문화재청, 용인시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조 중 하나인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읊은 ‘하여가’의 답가인데, 이로 인해 죽음을 당했지만 한편으로는 충절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정몽주는 공민왕 9년(1360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친, 문무를 겸비한 재상으로 후진 양성을 위해 오부학당을 열고, 향교를 세워 유학을 진흥하며, 조선 시대 꽃핀 성리학의 기초를 만든 학자다.
이성계의 세력이 날로 커져 조준, 정도전 등이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끝까지 고려 왕실을 지키려다 공양왕 4년(1392년)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당시에는 역적으로 몰려 방치되다가 위험을 무릅쓴 우현보와 송악산의 스님들이 수습해 한동안 개경의 풍덕에 가매장했다가 이후 용인 능원리로 이장했다. 고향도 아니고 연고가 없는 용인에 이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향(경북 영일과 영천) 중 한 곳인 영천으로 이장할 때,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자 앞의 명정(銘旌, 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관직·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묘소에 떨어져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는 간신으로 규정되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충절의 표상으로 추앙받은 정몽주는 태종 1년(1401년) 영의정으로 높임을 받았고, 중종 때에는 문묘(文廟)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특히 정몽주의 문하생인 권우에게 학문을 배운 세종대왕은 그를 성자로 받들어 <삼강행실도> ‘충신’ 편에 정몽주를 수록했으며, 무덤을 성역화하기도 했다.

정몽주 선생 묘와 충렬서원에서 충절과 학덕을 기리다 정몽주 선생 묘는 단아하고 정갈하다. 단분(單墳)으로 묘비에는 고려 시대의 벼슬만 쓰고 조선의 시호를 기록하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분명히 했다. 묘역 입구의 신도비는 숙종 22년(1696년)에 건립했는데, 송시열이 짓고 명필 김수항이 썼다. 비에는 왕조와 시대를 뛰어넘은 정몽주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한 내 용이 적혀 있다.
묘 근처인 모현읍 능원리 118번지에는 정몽주를 추모하는 충렬서원이 있다. 선조 9년(1576년)에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정몽주와 조광조의 학문, 덕행 및 충성스러운 절개를 기리기 위해 지은 서원으로, 광해군 원년(1608년)에 임금이 이름을 짓고 현판을 하사해(사액) 나라의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아 선현 배향과 지방민의 유학 교육을 담당했다. 서원은 마을 뒤쪽 야산 기슭에 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공부하는 강당을 앞쪽에 배치하고 사당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입구의 홍살문과 내삼문·외삼문·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강당이 축에서 벗어나 사당과 나란히 보이는 점이 특이하다. 충신의 아이콘인 정몽주. 요즘 시대 충신이란 어떤 사람일까? 왕의 권위가 절대적이던 예전과는 다르겠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은건 지도자를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비판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충신이라는 점일 것이다.

주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