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숨은 영웅, 레클리스와 지게부대 이야기 연천 백학마을
연천군 백학면은 국가보훈처에서
지정한 ‘호국영웅정신계승마을 제1호’ 마을이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고 호국에 앞장섰던
백학마을의 숭고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글. 이정은 사진. 전재호
지게를 지고 전쟁터에서 활약한 지게부대와 병사 10명의 몫을 해낸 군마 레클리스
1953년 3월, 연천군 백학면 매현리에서 치러진 ‘네바다 전초전’은 미국 해병 1사단 5연대가 중공군 120사단을 막아낸 치열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승리로 이끈 병사가 있었으니, 군마(軍馬) 레클리스다. 본래 이름은 ‘아침해’였는데, 얼마나 용맹했는지 미군들은 ‘무모하다’는 뜻의 ‘레클리스’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아침해가 미군에 입대한 사연은 이렇다. 전장이 대부분 험준한 산악 지대라 식량과 포탄 운송에 어려움을 겪던 미군은 말을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때마침 피란길에 다리를 다친 여동생의 의족을 사기 위해 말을 팔려던 김혁문을 만나 레클리스를 산다. 제주에서 태어나 경주마로 활약하던 레클리스는 신장 142cm, 체중 410kg의 작은 암말이었지만 일반 병사 10여 명의 몫을 해낼 정도로 전투력이 뛰어났다. 게다가 머리도 영리해 사람이 두어 번 동행해주면 그 뒤에는 혼자 보내도 알아서 길을 찾아가고, 사격이 시작되면 엎드릴 줄도 알았다. 병사들이 자신의 방탄복을 벗어 보호할 정도로 레클리스는 소중한 전우였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의 요청으로 샌프란시스코로 간 레클리스는 상병에서 병장으로 진급했고, 1959년에는 하사로 임관했으며, 스무 살까지 살다 1968년에 눈을 감았다. 한국과 미국 대통령 표창을 비롯해 미 ‘퍼플 하트’ 훈장 2개, 미 해군 사령관 표창 2개, 한국전쟁 참전 유엔 훈장 등 수많은 훈장을 수훈하고 표창을 받았을 뿐 아니라 미국 잡지 <라이프>에서 선정한 ‘미국의 100대 영웅’에 이름을 올렸다. 워싱턴, 링컨, 테레사 수녀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네바다 전초전투 현장이었던 백학마을과 여생을 보낸 미국에서는 레클리스를 기리는 행사를 열고 있다.
군번도 계급장도 없는 숨은 영웅들
한국전쟁에는 레클리스처럼 숨은 영웅이 많다. 지게에 탄약과 식량을 지고 최전방까지 나른 KSC(Korea Service Corps) 노무자 부대, 일명 지게부대원이 그들이다. 약 30만 명에 달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난리통에 입증할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참전자 또는 전사자로 인정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백학면 출신 금동훈 씨도 그중 한 명이다.
“아버님이 17세에 노무자 부대 하사관으로 참전하셔서 대덕산 전투, 연천 백학·장남, 파주 일원 임진강 지역에서 군수품 운반과 부상병, 전사자 후송 업무를 맡으셨대요. 45kg 정도의 포탄을 지게에 지고 하루 5시간씩 전장을 오르내리셨답니다.”
아들인 백학역사박물관 금가현 관장은 “정부에서 참전 사실을 몰라 20세가 되던 해에 또다시 입영 영장이 나왔다”며 “논산훈련소에 면담을 통해 한국전쟁 참전 사실이 확인돼 전역하셨다”고 후일담을 전했다.
2023년 경기도 관광테마골목사업으로 조성한 레클리스 거리에는 지게부대, 레클리스, 백학면 세시풍속 등을 벽화로 그렸다.
연천 최초 3·1만세운동 발상지
백학면에 한국전쟁 영웅이 많은 이유는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백학면은 군사분계선을 끼고 남과 북으로 갈린 마을이다. 21개 마을로 이루어졌으나 13개 마을을 제외한 나머지는 미수복 지역으로 남아 있다. 마을 지도를 보면 누워 있는 한반도 모양새다. 게다가 백학면행정복지센터가 있는 두일리는 연천에서 최초로 3·1만세 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3·1만세운동부터 지게부대, 한국전쟁 참전 유공자, 레클리스까지 그 어느 마을보다 나라의 안위를 염려하고 호국에 앞장섰던 백학마을은 호국 정신을 인정받아 지난 2015년 국가보훈처가 ‘호국영웅정신계승마을 제1호’로 지정했다.
“미국에는 레클리스 기념관이 있고 여기저기 동상도 많은데, 정작 우리 마을에서는 잘 모르고 있었어요. 뒤늦게 ‘용맹한 사람들의 후예’라는 단체를 주축으로 ‘아침해 기념사업회’를 결성해 다양한 홍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16일에 진행된 레클리스 추모 56주기 기념식에서 만난 이상경 아침해협동조합 이사는 “주민들이 직접 백학역사박물관을 짓고, 마을해설사를 양성해 마을 투어도 진행하는 등 마을의 역사와 정신을 잇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호국과 평화의 맥을 잇는 사람들
백학역사박물관에는 백학면 100년의 역사가 벽화로 그려져 있고, 참전 용사 사진과 유품, 철모, 총기류, 탄알, 포탄류, 제1땅굴, 오토마타(기계장치를 통해 움직이는 인형이나 조형물)로 재현한 지게부대원과 레클리스 등이 작지만 알차게 전시되어 있다. 마을박물관 건립을 추진한 금가현 관장은 “지금은 신기하고 생소한 것이 됐지만 한때는 생계용으로, 혹은 놀잇감으로 사용되던 전쟁 유물”이라며 “분단 상황을 잊고 살아가는 어린 세대와 후손들이 박물관을 보고 평화와 안보의 중요성을 깨달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밝혔다.
지난 2021년 경기도 문화특화지역(문화마을)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DMZ 접경의 대표적 문화 마을로 발돋움한 백학은 거점 공간인 ‘DMZ백학문화활용소’를 비롯해 역사와 문화를 총정리한 <38선과 휴전선을 품은 백학>을 발간했으며, 백학면 두일장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플리마켓 ‘백학3.8장’을 여는 등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지난해에는 ‘2023년 경기도 구석구석 관광테마골목’ 사업에 선정되어 ‘연천 백학 호국영웅 레클리스 거리’를 조성하고 평화와 안보를 테마로 한 관광 프로그램도 개발했다. 6명의 마을해설사가 뜻을 모아 시작한 ‘백학DMZ마을여행사’에서는 마을 투어뿐 아니라 DMZ평화안보관광 등 생생한 분단의 역사와 아픔, 연천의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여행 상품을 운영 중이다.
DMZ를 마주한 경기도 최북단이자 아직도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지만 그 비극과 아픔을 후대에게 물려줄 마을의 정신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백학마을은 주민들이 앞장서 만든 마을 역사와 문화 콘텐츠로 지난날의 총성을 지워가고 있다.

백학마을로 놀러 오세요

면 단위의 작은 마을이지만 역사적 사건이 집약된 곳으로 볼거리가 많다.

연천 백학 호국영웅 레클리스 거리
한국전쟁으로 떠났던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백학마을이다. 경기도 관광테마골목사업으로 조성된 레클리스 거리는 마을 보호수인 느티나무와 백학광장을 중심으로 골목골목 이어지며 레클리스, 지게부대, 제1땅굴, 마을 제사&떡국꺾기(설날부터 보름까지 이웃들이 돌아가며 떡국을 끓여 함께 먹던 풍습) 세시 풍속 등을 벽화로 그렸다.
주소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백로32번길 일대
레클리스 카페
시골 동네에 있는 작은 카페라고 해서 무시하면 안 된다. 다문화가족의 소통 공간이자 마을 기업인 레클리스 카페는 남궁금복 대표가 공들여 로스팅한 커피 맛이 일품인 곳이다. 레클리스 사진을 비롯해 방한했던 미국 참전 용사들의 자필 서명과 사진, 연천군 출신 참전 용사들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여러 기념물이 인테리어를 대신하며 레클리스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주소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일로143번길 41
문의 031-835-5007
DMZ백학문화활용소
DMZ문화마을 거점 공간이자 커뮤니티 공간으로 조성했다. 백학마을 주민 삶의 가치와 지역 내외의 문화 예술을 연계하는 다양한 전시 및 프로그램을 기획·교육하고 있다. 올해는 경기문화재단에서 시행하는 에코뮤지엄 사업으로 더 많은 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마을을 위한 공간으로 거듭날 예정이다.
주소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백로 29-1
문의 031-839-2155
백학방앗간
백학마을 주민들이 애정하는 방앗간. 부모님의 방앗간을 물려받아 이상경 대표가 운영하고 있다. 임진강에서 자생하는 물쑥을 이용한 떡과 차는 쑥 향이 가득하고, 연천 콩으로 만든 두부는 고소하고 달큼하다. 연천산 참깨와 들깨로 짠 참기름, 들기름은 선물용으로 인기 만점. 가래떡과 두부는 전곡농협 하나로마트에서 구입할 수 있다.
주소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일로 155
문의 0507-1390-5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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