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무형문화재 문재숙 명인의 명품 인생론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문재숙
명인은 한국 전통악기인 가야금의 대가로,
국악을 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평생을 바쳐왔다.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 이하늬의 어머니로 알려진
문재숙 명인의 가야금 사랑을 들었다.
글. 이선민 사진. 전재호
가야금은 전통 현악기로 순우리말로 ‘가얏고’라고도 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악기 가야금이 최근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도 아니고 웬 기네스북이냐고? 여기에는 중국의 도발이 숨어 있다. 중국은 가야금을 자국 문화재로 지정한 뒤 2013년 854명이 출연하는 대규모 가야금 공연을 열고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했다. 세계를 상대로 가야금이 중국의 악기임을 알리려 한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가야금을 중국의 악기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까지 시도했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나선 이가 있으니, 바로 문재숙 명인이다.
“2013년 세미나 참석차 중국 연변대학교에 갔는데, 가야금을 하는 조선족 제자들이 한 명도 안 보이는 거예요. 다들 어디 갔느냐고 물으니 가야금을 기네스북에 올리기 위한 공연 연습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중국이 벌써 1,000명 이상이 함께 추는 장구춤, 상모돌리기를 기네스북에 올렸는데, 가야금까지 중국의 악기로 뺏기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재숙 명인의 뜻에 동참한 가야금 연주자들이 힘을 모았다. 2017년 9월 30일 대한민국 가야금 연주자 1,168명이 ‘1004금(琴)의 어울림’ 공연을 성대히 치러낸 것이다. 문재숙 명인은 말했다.
“영토보다 우리 문화를 빼앗기는 것이 더 무서운 거예요. 문화를 빼앗긴다는 건 곧 우리 선조의 혼과 얼을 잃는 것과 같기 때문이죠.”
영토보다 문화를 빼앗기는 것이
더 무서운 거예요.
문화를 빼앗긴다는 건 우리 선조의
혼과 얼을 잃는 것과 같기 때문이죠.
가야금은 내 운명
문재숙 명인은 오빠의 권유로 가야금을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야금이 자신의 운명임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녀의 오빠는 전 국회의장 문희상 씨다.
“언니도 가야금을 배웠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야금에 관심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장난 삼아 시작했는데, 점차 가야금의 매력에 빠져든 거죠. 그러면서 가야금이 운명이라고 생각해 지금까지 한길을 걷게 됐어요.”
문재숙 명인은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다. 가야금산조는 19세기 후반, 영암 출신 김창조 명인이 처음 창시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다양한 유파가 전승되고 있는데, 김죽파류 산조를 만든 김죽파 명인은 김창조 명인의 손녀다. 문재숙 명인은 김죽파 명인의 산조를 익혀 1979년 처음으로 가야금산조를 녹음했으며, 2006년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는 건 가야금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고 전통음악의 가치를 보존하는 데 책임을 지라는 뜻 아닐까요. 그래서 정기 공연은 물론 전국에서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전통음악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문재숙 명인은 의정부 국제가야금축제도 만들어 가야금 음악의 전승 발전과 국제화 및 전통 예술 활성화를 통해 문화도시로서 의정부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의정부에서 축제를 개최하게 된 이유는 그녀가 의정부에서 태어나 유치원부터 대학 때까지 계속 살아왔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뜨면 한쪽에는 도봉산이, 또 다른 쪽에는 수락산이 펼쳐져 의정부가 자신의 진정한 ‘홈타운’이라고 말했다. ‘1004금(琴)의 어울림’ 공연도 의정부에서 진행했다.
“올해 제12회 축제를 열어야 하는데 지원이 끊겨 어려움이 큽니다. 의정부 국제가야금축제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에요. 지역과 겨레의 얼을 살리기 위한 축제로 자리매김해야 하는데 계속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축제를 이어나가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문재숙 명인은 경기도민도 관심을 갖고 응원해달라고 당부했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는 건 가야금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고 전통음악의 가치를
보존하는 데 책임을 지라는 뜻 아닐까요.
그래서 정기 공연은 물론 전국에서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전통음악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가야금 통해 우리 전통 이어갈 수 있도록 최선 다할 것
그녀는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 이하늬의 엄마로 더 유명하다. 문재숙 명인의 두 딸 모두 가야금을 전공했다. 그렇다고 가야금을 해야 한다고 강요한 적은 없단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고, 그 안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부모님도 저를 굉장히 자유롭게 키우셨거든요. 솔직히 저도 국악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았으니 아이들도 그렇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항상 국악을 하는 제 모습을 봐왔기에 당연히 가야금을 해야 하나 보다 여겼을지도 몰라요.”
문재숙 명인은 큰딸이 어릴 때 친구 집에 갔다가 가야금이 없는 것을 보고 놀랐다며, 집집마다 가야금이 있다고 생각할 만큼 국악이 당연한 집안 분위기도 아이들의 진로에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덧붙였다. 그녀가 자녀를 자유롭게 키운 것은 이하늬가 대학원생 시절 가족 모르게 YG엔터테인먼트에서 투애니원(2NE1) 연습생 생활을 했던 데서 드러난다. 그때도 문재숙 명인은 나중에 딸이 연습생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말리지는 않았다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하늬는 배우가 된 후에도 기회가 되면 가야금 공연에 참여하고 있다. 문재숙 명인은 가야금을 하는 두 딸, 대금을 하는 아들 이권형 씨와 함께 ‘이랑’이라는 가족 앙상블 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아들 이권형 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이수자다.
“연주는 인생 경험과 깊은 통찰이 필요해요. 젊을 때는 테크닉에 집중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음악의 깊이와 감정을 좀 더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거든요. 단순한 기술 연마를 넘어 인생의 경험과 철학이 녹아들어야 진정한 가야금 연주가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연습을 게을리할 수가 없어요.”
문재숙 명인을 만나기 전날인 7월 5일에는 예술의전당에서 공개 행사 ‘파랑’이 열렸다. 문재숙 명인은 연주하는데 눈물이 계속 나더라며 좋은 관객을 만나는 것은 연주자에게 큰 행운이라고 말했다. 관객이 응원해주고 공감해줄 때 더 좋은 연주가 나오는데, 전날 딱 그런 공연이었다고 회고했다. 문재숙 명인은 공연 준비를 할 때 어떤 관객이 올 것인지에 따라 다른 연주곡을 준비한다고 한다. 어찌 보면 그것이 관객과 호흡하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한길을 걷는다는 게 쉽지는 않지만, 평생 운명으로 가야금과 함께해왔어요. 앞으로도 체력이 되는 한 계속 연주해야죠. 나이 든 사람들은 이 시대에 해야 할 몫이 있는데, 저는 가야금의 전통을 이어가야 할 책임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후학 양성은 저에게 아주 중요한 사명입니다.”
문재숙 명인의 가야금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국가무형문화재로서 주어진 사명감은 단순한 개인의 열정을 넘어선 것으로 느껴졌다. 가야금을 통해 자신의 삶을 표현하고 의정부를 가야금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문재숙 명인의 다짐은 그녀의 인생 또한 명품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문재숙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로,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이자 신한대 석좌교수다. 또 사단법인 예가회 대표와 사단법인 가야금산조진흥회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문재숙 명인은 가야금산조 명인 고(故) 김죽파 선생에게 산조와 풍류, 병창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학습을 통해 전수받은 수제자로 죽파 선생의 성음을 고스란히 담아낸 연주를 선보여왔다. 또 한국학중앙연구원(전 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김죽파 가야금산조의 발전 과정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할 정도로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연주자다.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 이하늬의 어머니이자 문희상 전 국회의장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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