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의 경기 백년 식당 동두천 경양식
노포 ‘오륙하우스’

흔히 ‘캠프 케이시’나 ‘보산동 미군 부대’,
또는 ‘2사단 사령부’라고 부르는
동두천 미군 부대 앞에 오륙하우스가 있다.
올해로 53년, 2대째 이어지는 노포다.

글. 박찬일 사진. 전재호



Since 1969, 미군도 사랑하던 돈가스 동두천역 앞에는 손님 기다리는 택시가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불경기에 코로나19 사태가 겹친 한국의 2022년 봄 풍경. 더구나 동두천은 더 힘든 시기인지도 몰랐다.
“2사단이 평택으로 갔으니까요. 여기 경기가 죽었지요.”
‘오륙하우스’, 더러 ‘56하우스’라고도 쓰며 인터넷 검색창에 숫자로 입력해도 제대로 가게를 검색해준다. 이 가게를 아는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부터 물어보았다.
“1956년에 생긴 가게인가요?”
“그거 많이들 물어봐요.(웃음) 부산 출신이냐고도 하고요(부산에 오륙도가 있다. 조용필의 전설적 노래 가사에도 나온다).” 오는 그냥 성씨 오(吳)다. 육은 오 씨의 여섯 가족을 말한다. 왜 이 가게의 창업자는 오 씨, 여섯 가족을 강조했을까? 이건 조금 후에 다시 얘기해보자. 우선은 음식을 먹자. 아, 앞에 말한 이는 오충호 씨다. 1957년생(56년생이 아니다)이니 당년 예순여섯. 아직 봄바람이 차서 파카를 입혀 미군 부대 앞으로 사진을 찍으러 갔다. 그의 얼굴에 피로감이 짙었다. “요즘 레트로가 유행이래요. 그래서 우리 집이 떴어요. 텔레비전에도 나왔고요. 아, 박 형 하는 프로에도 나왔잖아. 손님이 좀 많아요. 일할 직원은 구하기 어렵고, 아내랑 둘이 아주 힘겹게 버티고 있어요.”
여담이지만, 필자가 진행하던 프로그램에도 그의 가게가 노포(老鋪)로 나왔다. 오래된 가게를 뜻하는 이 한자어는 국어사전에 등재된 단어다. 보통 노포라고 하면 국밥집이나 갈빗집, 냉면집인데 그이의 가게는 경양식집이다. 그것도 미군 부대 심장부 앞에 있던 집. 그래서 혹자는 오륙하우스를 ‘중(重)양식집’이라고 부른다. 무거울 중 자. 일반 경(輕)양식집과는 다른 무엇이 있다는 뜻이다. 사실 경양식이란 말도 한국에서 생긴 조어다. 미군 또는 미국인이 즐겨 먹는 묵직한(?) 양식에 비해 가벼운 양식이라는 뜻에서 파생된 유행어.

“옛날에 아버지는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재료를 쓰셨지요. 여기 7사단 시절부터 군속이셨어요. 장교 클럽 셰프였어요.” 아버지 오진우는 1919년생, 3·1운동이 일어난 해다. 평남 대동군 출생. 이곳은 사실상 평양시에 속하는 지역이다. 한국의 여느 이북 사람처럼 이 가족에게도 비극적인 생애사가 서려 있다. 많은 월남민이 고향인 북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땅, 동두천·의정부·연천 같은 접적 지역에 살았다. 기본적으로 실향민이 많이 살아서 의지할 동향인을 찾을 수 있었고, 군부대가 많이 생기면서 혈혈단신 내려온 이북 출신들이 일거리를 얻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오륙하우스의 맛은 아버지 오 씨의 솜씨에 아들의 솜씨가 더해지고 덜어지고 섞여서 내는 맛이다. 아들 오 씨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아버지가 맛있는 양식 요리사였으니까. “장교 클럽에서 스테이크는 물론 가벼운 스낵도 만드셨대요. 토스트, 달걀 요리, 베이컨 같은 거 굽는 거죠. 미국식 요리법에 통달한 셈이에요. 당시 미군 부대 다니면 월급이 좋았어요. 나중에 은퇴하고 여기에 식당을 내신 거죠.”

“아직도 냄새가 코끝에 남아 있어요. 아버지가 굽던 베이컨 냄새. 달걀 요리도 다양하게 하셨어요, 스크램블에 반숙에, 온갖 프라이를 요구대로 만들어주셨죠.
그렇게 미군들이 커피에 아침 먹고 부대로 가곤 했죠.”


촉망받던 호텔 요리사 아들,
아버지의 숨결을 잇다
아버지는 아침 6시면 아메리칸 브렉퍼스트를 만들었다. 영외 거주하는 미군들이 부대로 출근하다가 냄새를 맡고 아침 식사를 하러 들어왔다. 부대에서 갈고닦은 솜씨이니 여간했겠는가. “아직도 냄새가 코끝에 남아 있어요. 아버지가 굽던 베이컨 냄새. 달걀 요리도 다양하게 하셨어요. 스크램블에 반숙에, 온갖 프라이를 요구대로 만들어주셨죠. 그렇게 미군들이 커피에 아침 먹고 부대로 가곤 했죠.”

오륙하우스는 1969년에 문을 열었다. 지금 건물에서 바로 몇 발짝 앞이다. 길이 뚫리면서 뒤로 물러서게 됐고, 지금의 건물을 올렸다. 테이블 4개짜리 식당이 제법 규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영업이 잘됐어요. 당시 동두천은 경기가 좋았으니까. 달러가 많이 풀리고.” 그러다가 덜컥 아버지가 쓰러졌다. 폐암이었다. 고기 굽고, 튀기고, 연기를 많이 들이마셨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 뒤를 이을 생각이었지만, 당시 그는 촉망받는 롯데호텔 요리사였다. 아버지 뒤를 잇기엔 너무 일렀다. 십몇 년을 일하고 돌아오기 전까지 가게는 어머니가 꾸렸다. “직원 고용해서 주방을 꾸렸어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죠. 저는 호텔에서 근무하고. 결국 식당을 제가 해야 하는 숙명의 시간이 왔죠. 퇴직하고 식당을 물려받았어요. 1998년도 일입니다.” 그가 호텔에서 일하는 동안 아내(안옥경, 1958년생)가 고생을 많이 했다. 아내는 지금도 그의 동반자다. 같이 요리한다. 주방에 들어가니 부부가 주방장, 부주방장이다. 수십 가지 메뉴를 일일이 손으로 만들고 꾸린다. 예전에 유행하던 온갖 메뉴가 다 있다. 돈가스, 정식, 비프가스에 생선가스, 버거, 스파게티… 끝이 없다.

수프와 샐러드를 기본으로 곁들여 내는 것도 추억 그대로다. 양송이 수프 한 그릇도 ‘제품’이라고 부르는 인스턴트를 안 쓴다. 육수 내고 양송이 볶아서 고루 곁들여 끓인다. 버거도 다 ‘수제’다. 미국식으로 쇠고기에 빵가루, 달걀을 섞어서 굽는다. 요리를 준비하는 주방의 각종 기물이 희한하다. 뒤집개를 보니 손잡이가 없다. “아버지가 쓰시던 거예요. 튼튼하기도 하고, 아버지 생각에 그냥 써요. 이 국자도 아버지 시대의 물건입니다. 50년이 넘었지요. 아, 이 그리들(griddle)도 아버지가 사서 쓰시던 그대로예요. 두꺼운 옛날 철판입니다. 햄버거 굽고 스테이크 만들기 너무 좋죠. 낡았지만 아주 쓸모 있습니다.” 낡아도 너무 낡았지만, 이런 도구가 노포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버리지 않는다는 마음은 사람들에게 맛있는 걸 해 먹인다는 아버지의 정신뿐 아니라 소소한 도구에도 깃들어 있는 듯하다. 추억의 돈가스를 비롯해 경양식을 만드는 집, 그러나 추억으로만 머물지 않는, 제대로 된 맛도 있는 집. 오륙하우스는 앞으로도 56년은 더 이어질 듯하다. “사위가 이걸 하겠대요.(웃음) 요리사도 아니고 직장인이거든요. 주말에 와서 거들면서 배우고 있어요. 설마 하겠어요? 이게 얼마나 힘든데.”
양식집도 노포가 있다는 사실. 우리나라에도 꽤 오래된 양식 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