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백숙·닭볶음 노포 광주 용마루

기력이 쇠할 때 찾는 대표적 서민 음식, 닭백숙.
광주 남한산성 백숙거리에는 3대째 맛을 이어가는 닭백숙 노포 ‘용마루’가 있다.

글. 박찬일 사진. 전재호

택시가 호흡을 몇 번씩이나 가다듬으며 급커브를 돌았다. 차창 밖으로 화려한 도시의 불빛이 점점 멀어져갔다.
“택시가 이 길을 잘 안 가요. 은근히 높고 험하거든요. 남한산성이 달리 산성이 아니에요.”
조선왕조는 이곳에 유사시 항쟁하면서 버틸 수 있도록 행궁을 지었다. 택시에서 내리니 찬 공기가 훅 달려들었다. 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와 산의 힘찬 기운이 얼굴에 와닿았다. 밭이 조금씩 보이는데 높은 철망이 둘러쳐져 있다. 나중에 들으니 고라니, 멧돼지가 밭을 헤집어 놓아서 그렇단다. 백숙거리의 ‘찐’ 닭백숙집 이곳은 꽤 깊은 산에 위치한다. ‘전승문 150m, 행궁 500m’라는 안내판 아래 특이하게도 ‘닭죽’이라는 공식 안내문이 보인다. 좋은 문장으로 왜 이곳이 닭죽이라는 말을 쓰게 됐는지 설명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남한산성이 근대 이후 군사·행정 도시로서 기능을 잃자 산성 일대에 살던 주민들이 이주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토박이들이 떠나지 않고 살고자 했고, 먹고살기 위해 닭죽을 끓여 팔면서 이 마을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과 영화에서 보던 조선 후기 남한산성이 현대적 의미로 군사 기능을 잃자 이 일대가 새로운 권역으로 변화했다는 뜻이다. 그때 남은 후손 중 한 집이 바로 ‘용마루’다.
“올라오다가 회전삼거리 지나셨죠? 거기에 할머니가 하시던 우리 집안 식당이 있었어요. 그 동네를 헐고 행궁 복원 사업을 하게 되면서 우리 가게도 이전했어요. 그 자리가 바로 여기예요.”

용마루는 회전삼거리에서 북상하다가 왼쪽 국청사 길로 가면 왼쪽에 자리한다. 해발이 제법 높다. 가게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역사의 무대였던 산성과 여러 유적이 나온다. 걸어 올라가는데 무릎에 하중이 제법 실린다. 길옆으로 맑은 물이 완전히 복개되지 않은 개울을 따라 흐른다. 여름에는 수량이 제법 될 듯하다.
“백숙거리라는 말을 써요. 이 동네 사람들이 죄다 백숙을 팔았으니까요. 어머니는 산에서 야생하는 꿩, 토끼 같은 것도 같이 팔았어요.”
3대째 운영하고 있는 딸 임국희(42) 씨가 어머니 백승옥(65) 씨와 함께 설명해준다. 가게의 시초는 김유득 할머니다. 97세까지 장수하다가 2014년에 돌아가셨다.
“두 형제가 산성식당이라는 이름의 가게를 어머니와 같이 꾸렸고, 이제는 각기 다른 식당을 해요. 산성식당이란 이름은 안 쓰고요.”
아랫대에 와서 각기 분가를 한 셈이다. 백 씨가 남편과 함께 분가한 이 가게는 용마루가 되었고, 3대 임국희 씨로 이어진 것이다. 1979년에 개업했으니 업력 40년이 넘었다. 이 동네는 ‘맡길 임(任)’자를 쓰는 풍천 임씨 집성촌이다. 얘기를 하다 보니 산성리 역사로 넘어간다. 앞서 안내판에 쓰여 있는 대로다. 1960~1970년대에 국립공원급 자연 풍광의 서울 근교가 거개 그랬듯이 물 좋은 계곡에 평상 깔고 닭, 오리 같은 요리를 먹으며 쉬는 동네였다. 유원지라고도 했다. 이제 이 일대는 모두 정비되고 역사 유적지인 남한산성다운 멋을 지니고 있는데, 여기서 살던 사람들에게는 오랜 세월 치열한 삶의 현장이기도 했다. 가게에는 임국희 씨의 어린 아들이 나와 있었는데, 다니는 학교를 물어보니 산성초등학교란다. 임 씨 가족이 몇 대에 걸쳐 다닌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학교로, 한때 폐교 위기에 처하기도 했단다.
속칭 ‘도리탕’이라고 하는 닭볶음탕을 주문했다. 김유득 할머니의 레시피대로 만든 것이다. 주문을 하자 어머니 백승옥 씨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혼자 주방을 책임진다. 주문을 하자마자 닭을 요리하는지 압력솥 소리가 들린다.

우직하게 맛을 지키는 집 “아니, 주문을 받고 요리하나요? 효율이 떨어질 텐데….”
내가 걱정하자 딸 국희 씨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어요? ’ 하는 표정이다.
요리가 나왔는데, 크기를 보니 익히는 데 오래 걸리는 토종닭이다. 고지식한 집이다. 내 경험상 이런 집은 일단 믿을 수 있다. 심지어 메뉴판에 있는 산채정식은 겨울에 하지 않는다. 봄나물이 없으니 만들지 못하기 때 이다. 손님을 얻자면 불리한 일인데, 겨울에 없는 나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백승옥 씨의 눈빛이 유순하면서도 보통이 아니었는데, 고집이 대단하다고 딸이 얘기 한다. ‘그럼 그렇죠. 그런 노포의 고집이 있어야죠’ 하고 나는 속으로 말했다. 특이하게 ‘반반전’이라는 메뉴가 있다. 딸 국희 씨가 합류하면서 메뉴판에 올린 음식이다. 도토리와 감자전이 반씩 ‘붙어서’ 지져 나온다. 꼭 맛봐야 할 추천 메뉴다. 노포는 옛것과 새것이 서로 섞이면서 대를 이어가게 마련이다. 가게가 티끌 하나 없이 정갈한데, 가정집 느낌이 많이 나서 푸근하다. 원래 가정집을 사서 이전했고, 이 집에서 가 족이 실제로 산다. 국희 씨는 회사원이었다. IBM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해 영국문화원에 다녔다. 영어과를 나와 어학 실력이 빼어난 까닭이다.

“아이들 낳고 육아휴직을 하다가 어머니를 도와 본격적으로 가게를 맡자고 결심했죠. 노포로 계속 키워갈 생각도 있었고요. 할머니의 손맛을 지속적으로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노포의 힘이란 이런 거다. 노포는 대를 이어갈 수 있는 기운이 있다. 어머니 백 씨가 시집와서 시어머니를 도와 식당 일을 할 때 백숙이며 볶음탕이 7,000원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6만 원(볶음탕), 7만 원(백숙) 하는 메뉴가 됐다. 서넛이 같이 먹을 수 있고, 찬이 잘 나와서 비싸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나물 찬이 몇 접시 나오는데 아주 맛있다.
조선간장, 우리 기름으로 무친다. 음식이 심심하면서 혀에 착 붙는다. 뭐랄까, 복잡한 시내에서 둔감해진 혀가 깨어 나는 맛이다. 김치를 한 점 먹었는데, 아주 오래전의 서울 김치, 경기도 김치 맛이다. 아닌게 아니라 옛날 김치다.
“어머니가 할머니한테 배우신 대로 젓갈 거의 안 쓰고 심심하게 담그는 김치예요.”
좋은 노포를 하나 발견했다는 기쁨이 크다. 용마루는 중소기업벤처부가 인증하는 ‘백년가게’에도 선정되었다. 가게를 오래 지속할 동기가 될 것 같다.



박찬일
누군가는 ‘글 쓰는 셰프’라고 하지만 본인은 ‘주방장’이라는 말을 가장 아낀다.
오래된 식당을 찾아다니며 주인장들의 생생한 증언과 장사 철학을 글로 쓰며 사회·문화적으로 노포의 가치를 알리는 데 일조했다. 저서로는 <백년식당>, <노포의 장사법> 등이 있고 <수요 미식회> 등 주요 방송에 출연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