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의 경기 백년 식당 육개장 맛의 내리물림,
파주 보배집

파주시청 인근에 올해로 40년째 육개장 맛을 지켜온 ‘보배집’이 있다.
단골부터 전국에서 찾아온 식도락가까지,
늘 사람들로 붐비는 이 노포에는 과연 어떤 맛과 삶이 숨어 있을까?

글. 박찬일 사진. 전재호

1700년대 말에 출간한 <경도잡지>에 육개장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구장’ 끓이는 법이 나온다. “고기에 총백(파)을 섞어 삶는다. 국을 끓여 고춧가루를 뿌리고 흰밥에 말아서 먹는다”라고 쓰여 있다. 딱 요즘의 경상도식 육개장이다. 1972년에 시작한 보배집 보배집 사장 김한신(53) 씨가 육개장 국물 맛을 보고 있다. 고개를 끄덕인다. 정결한 부엌 안에 고소한 냄새가 가득하다. ‘매콤함’과 ‘고소함’은 육개장 맛을 표현하는 중요한 단어다. 여기서 고소함을 잘 기억해둘 것. 육개장 맛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장국의 일종인 육개장은 국물 문화로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한국에서도 인기 있는 음식이다. 국민 음식으로 손꼽을 정도다. 전국에 육개장으로 유명한 집이 몇 있다. 경상도는 대구다. ‘옛집식당’, ‘벙글벙글 집’, ‘국일따로국밥’ 같은 명가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경상도의 육개장은 유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서울의 두 육개장 명문인 ‘부민옥’과 ‘조선옥’이 경상도식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파를 많이 넣어 맛이 달고 시원하다. 경상도식(대구)이다. 특히 한국의 가장 오래된 노포 랭킹 5위 안에 드는 조선옥은 육개장을 대구탕이라 붙여놓고 판다. 대구탕이라고 하면 생선 대구(大口)가 먼저 떠오르는데, 이는 오해다. 대구탕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경상도 대구의 별미라 하여 대구(大邱), 개장국을 대신한다 하여 대구(對拘)다. 대구의 육개장과 보신탕은 조리법이나 맛이 거의 비슷하다. 육개장은 생각보다 인문적인 음식이다. 다시 파주. 먼 길이다. 경의중앙선(과거에는 그냥 경의선이었다. 평양 지나 중국과 국경을 맞댄 의주까지 이어지는 노선이다)을 타고 한참 간다.

금촌. 한때 불광동에서 시외버스가 들어가는 터미널이 있었다. 손님으로는 주로 군인이 많았다. 하지만 원래 금촌은 큰 농사를 짓던 지역이다. 그 너른 들판이 이제 시가지가 되었다. “운정 쪽은 다 논이었어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낮은 구릉과 밭, 논이 전부였죠.” 이미지가 대학교수 같은 김 사장의 설명이다. 가게 안에 한 노인의 사진이 걸려 있다. 김재흥 옹이다. 2008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를 추억할 겸, 보배집 역사로 남길 겸 붙여놓은 사진이다. 닮았다. 김 옹은 원래 충청도 사람이다. 서울에서 살다 지금의 파주 금촌으로 왔다. 그가 다섯 살 때다. 그러니까 보배집의 역사 ‘since 1972’의 출발이다. “경의선 기차를 타고 쭉 가보셨대요. 서울에서 하던 사업을 접고 어디선가 새롭게 시작하려고 동네를 찾던 중이셨던 거죠.”

고소함의 비밀은? 그때 금촌역에 사람이 많이 타고 내리더라는 것이다. 장사는 ‘목’이고, 그 목은 사람의 유동 숫자다. 김 옹은 터미널 앞에 식당을 차렸고, 그의 판단은 옳았다. 터미널은 으레 탕국물이 대세다. 설렁탕, 육개장, 해장국이다. 김 옹이 아내(김인숙)와 아이들을 이끌고 이곳에서 시작한 것이 바로 보배집이다. “처음에는 한식 메뉴를 두루 팔았어요. 갈비도 팔고요. 육개장으로 메뉴를 단일화한 것은 더 나중 일이에요. 어머니가 주방을 맡고, 아버지는 홀을 보시고.” 보배집은 동네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가게를 운영하는 김 사장 부부(아내 최윤선, 48)는 금촌의 오랜 단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게가 유명해져 멀리서 오는 분도 많고, 이곳이 신도시가 되어 새로 유입되는 손님도 많아요. 그래도 저희는 옛 금촌의 오래된 손님들이 각별하죠. 부모님 때부터 오시던 손님이고 단골이니까요. 다들 연로하셔서 어쩌다 한번 오시지만, 잘 모시려고 합니다.”
금촌은 현재 아파트가 많이 들어섰지만, 여전히 장날이 있고 장이 선다. 1·6일장이다. 장날에는 특히 단골손님이 많다. 전 국토의 아파트화(?)로 이제 전통적 농촌 사회의 정서와 유대가 사라지고 있지만, 보배집을 중심으로 인문적 역사가 계속 이어지는 셈이다. 그래서 노포가 중요하다. 가게를 축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거기서 만나고, 생존의 기억을 ‘내리물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포는 맛집이 아닌, 살아 있는 인문 지리다.

오래전부터 먹어온 육개장은 적어도 18세기 이전에 조리법이 정리된 듯하다. 1700년대 말에 출간한 <경도잡지>에 육개장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구장’ 끓이는 법이 나온다. 고추를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육개장도 매운맛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고기에 총백(파)을 섞어 삶는다. 국을 끓여 고춧가루를 뿌리고 흰밥을 말아서 먹는다”라고 쓰여 있다. 딱 요즘 경상도식 육개장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수도권에서 널리 퍼진 서울식(경기식) 육개장은 경상도식과 어떻게 다를까? 일제강점기 신여성으로 우리나라 가정 요리계의 태두 격인 조자호(1912~1976)의 저서 <조선요리법> (1939)에는 ‘육개장국’이라 해서 레시피가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소고기 외 대창, 곤자소니를 거론한 점이다. 개장국이 원형인 대구식과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곤자소니는 소 창자에 붙은 기름이다. 고소한 맛! 글머리에서 보배집 부엌에서 퍼지는 고소함이란 바로 이것이다. “이미 다 밝혀서 숨길 것도 없어요. 저희는 두태 기름을 씁니다. 어머니의 비법이었어요.” 벌겋고 깊은 맛의 육개장을 끓일 때 두태 기름을 쓴다.

두태 기름은 소 콩팥 쪽에 붙은 기름인데, 고소한 맛이 강해 가격도 비싸다. 마늘이나 고기를 볶을 때 쓸 수 있고, 그냥 고추기름을 내듯이 한뒤 재료와 함께 버무려 끓이기도 한다. 곤자소니도 고소한 맛이 강하니, 이렇게 옛 요리의 원형과 연결되는 셈이다. 정성스러운 고집으로 지켜온 느림의 미학 보배집이라는 정겨운 이름은 어떻게 생겨난 걸까? “(웃음) 아버지가 서울 사실 때 자주 가던 식당 이름이라네요. 금촌에서 식당을 차린 뒤 관청에 가서 신고하는데, 상호를 묻길래 미리 정해두신 게 없어 얼떨결에 보배집이라고 말했답니다.” 과거 노포들이 거반 그랬다. 무허가가 많은 데다 보배집 김 옹처럼 상호도 없이 개업 신고를 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서 손님이 붙여준 이름을 그대로 신고하거나, 관청 직원이 붙여줄 때도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가게에는 손님이 많다. 음식이 생각보다 더디 나온다. 거의 단일 메뉴집인데도 서빙이 느린 데는 이유가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김한신 씨의 결벽증에 가까운 고집 때문이다.

육개장에 서울식으로 달걀을 올리는데, 그냥 넣고 끓이는 것이 아니라 수란처럼 풀어 한 그릇 한 그릇 부드럽게 만들어 올린다. 뭐가 다르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달걀은 너무 오래 익히면 황 냄새가 나고 식감도 나쁘다. 김 사장은 주문이 들어오면 조심스레 달걀을 풀어 뜨거운 육수를 부어가며 익힌다. 같은 요리사 입장에서 말리고 싶은 조리법이다. “노포라고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이런 걸 지켜줘야 노포라고 생각해요, 변하지 않아야 노포지요.”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 음식이 생각보다 더디 나온다. 거의 단일 메뉴집인데도 서빙이 느린 데는 이유가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김한신 씨의 결벽증에 가까운 고집 때문이다. 육개장에 서울식으로 달걀을 올리는데, 그냥 넣고 끓이는 것이 아니라 수란처럼 풀어 한 그릇 한 그릇 부드럽게 만들어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