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 충실하라
시대의 지성 이어령 선생.
비록 고인이 됐지만 그가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는 오래도록 기억된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고민에 대한
그의 답은 무엇일까?
故 이어령 선생은 초대 문화부 장관, 서울올림픽 준비위원장, 작가와 교수, 논설위원과 편집인 등 우리 같은 범인이 보기에 평생 자신의 한계가 없는 듯한 삶을 살았다.
서울올림픽의 굴렁쇠 소년을 연출하고, 일본식 표현인 노견을 ‘갓길’로 바꾼 것,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합성어 ‘디지로그’라는 신조어를 내놓고, 예술 하는 이들이 간절히 가고 싶어 하는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만든 것도 그다. 고인이 끝까지 신념처럼 내세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가 그를 언제나 오만하지 않으면서도 평생 최선을 다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메멘토 모리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나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뜻의 라틴어다. 나바호 인디언에게도 메멘토 모리가 있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라는 의미가 담겼다.
의미 있는 삶을 살려면 오늘에 충실해야 한다. 이어령 선생은 평생, 특히 인위적인 암 치료를 거부하고 조용히 떠날 날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오만하지 않고 성실하며 경건하게 죽음과
탄생의 신비를 탐구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꿰뚫는 혜안을 지닌 그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에게 전한 메시지들을 가상 인터뷰로 정리해본다.
Q 생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어요.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처음 받았던 가방, 알코올 냄새가 나던 말랑말랑한 지우개처럼.
내가 울면 다가와서 등을 두드려주던 어른들처럼. 내가 벌어서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어요.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열림원) 중
Q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힘들어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하신다면?
나는 이제 너의 죽음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아. 그만큼 죽음이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야. 추상명사가 아니라 물건 이름처럼 손으로 잡을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던지면 깨질수 있는 유리그릇 같은 아주 구상적인 명사로
죽음은 그렇게 내 앞으로 온 거야. 우선 나 자신부터 용서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어. 내가 나를 스스로 속이는 것에 대한 동정과 위로, 그리고 나의 그 거짓말을 덮어주고 사랑하는 관대함을 배웠지. (중략) 그러나 이제 나는 나의 약점까지도 사랑하게 되었어.
딱해서 그런 거지. 불완전하고 깨지기 쉬운 인간, 그 생명에 대해서 우려와 동정과 끌어안는 사랑의 방법을 조금 터득한 까닭이야.
<딸에게 보내는 굿나 잇 키스>(열림원) 중
Q 코로나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포스트코로나에 대한 다양한 전망이 나오고 있는데요, 포스트코로나에도 희망이 있을까요?
이 코로나로 인해 전 인류가 현재 대재앙을 겪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항상 대역병이 지나가고 나면 인구도 불어나고, 그 이전보다 번영이 이루어졌습니다. 페스트도 그랬습니다. 이러한 패러독스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이 런던 인구 3분의 1이 희생당한 1665년의 페스트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음 해 런던 대화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 이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비롯해 쟁쟁하고 왕성한 지식인의 활동과 산업혁명, 그리고 팍스 브리태니카(pax britannica)로 영국이 전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했어요.
런던만이 아닙니다. 페스트라는 재앙의 마지막 종착지였던 파리 역시도 페스트가 지나간 뒤 모든 면에서 이전보다 발전, 유럽의 문화 중심지로 화려한 꽃을 피웁니다. 이것이 바로 팬데믹의 패러독스입니다.
<메멘토 모리>(열림원) 중
Q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살면서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럭셔리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은 산 게 아니야. ‘세일해서 싸게 산’ 다이아몬드와 첫아이 낳았을 때 남편이 선물해준 루비 반지 중 어느 것이 더 럭셔리한가? 남들이 보기엔 철 지난
구식 스카프라도 어머니가 물려준 것은 귀하잖아. 하나뿐이니까. 우리는 겉으로 번쩍거리는 걸 럭셔리하다고 착각하지만, 내면의 빛은 그렇게 번쩍거리지 않아. 거꾸로 빛을 감추고 있지. 스토리텔링에는 광택이 없다네. 하지만 그 자체가 고유한 금광이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열림원) 중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은 산 게 아니야. ‘세일해서 싸게 산’ 다이아몬드와 첫아이 낳았을 때 남편이 선물해준 루비 반지 중 어느 것이 더 럭셔리한가? 남들이 보기엔 철 지난 구식 스카프라도 어머니가 물려준 것은 귀하잖아.
하나뿐이니까.
Q 기술이 발달하며 인간의 죽음도 사람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을 말하는 요즘,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인간다움을 잃지 않을까요?
디지털 환경이 아무리 바뀌어도 아날로그의 영역인 자연에서의 생명 활동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습니다. 쉬운 예로, 비즈니스가 네트워크를 통해 웹으로 이루어지면 해외 출장이 줄어들어 항공업체가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출장은 더 증가했습니다.
또 사람들은 전화나 메신저로 실컷 이야기한 뒤에도 “자세한 것은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합니다. 전화로 이야기한 내용과 직접 만나서 이야기 하는 정보의 온도 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재택근무, 소호(SOHO), 스마트워크 등이 급부상하면서 제기됐던 우려들도 대부분 예상에서 빗나갔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인간은 몸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지요. 세상이 아무리 디지털화되더라도 인간의 신체에는 사이버 세상의 논리가 그대로 통용되지 않습니다. 디지로그는 단순한 감성공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속도와 정보의 속도를 어떻게 조정하고 조화시킬 것인가’가
디지로그 이론의 최종적인 해답입니다.”
<이어령, 80년 생각>(위즈덤하우스) 중
Q 요즘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와 다른 표현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생님은 젊은이들의 언어에서 어떤 것을 느끼시나요?
젊은 세대들은 “감동했다”고 말하지 않고 “감동 먹었다”고 말합니다. 먹을거리가 없어서 배가 고팠는데 오늘의 한국인들은 감동거리가 없어서 마음이 고픈가 봅니다. 그래서 굶주림의 보릿고개가 아니라 비정한 문명의 사막을 넘어야만 춤추고 노래하며 살 수가 있습니다.
<짧은 이야기, 긴 생각>(시공미디어) 중
Q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하신다면 어떤 말씀을 하고 싶으신가요?
딱 한 가지야.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 그리스 사람들은 진실의 반대가 허위가 아니라 망각이라고 했어요. 요즘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잊어서 그래요. 자기가 한 일을 망각의 포장으로 덮으니 어리석어요. 부디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열림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