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성당,
한옥으로 지은 이유

1922년 공베르 신부가 지은 안성성당은 서양식 내부와
한국식 외관을 지닌 초기 성당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1985년 경기도 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되었다.

글. 이정은 사진. 문화재청






1794년 청나라 신부 주문모에 의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천주교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민중을 비롯해 정약용, 이승훈 같은 개혁 성향의 학자들을 통해 급속도로 확산했다. 이런 현상을 염려한 조선 조정은 천주교 신자를 처형하거나 유배를 보냈는데, 이를 박해 또는 사옥이라고 한다.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는 프랑스 선교사 9명과 8,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가 처형당한 천주교 최대 박해 사건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를 전후해서 안성 지역 여러 곳에 천주교 신자가 모여 살았다. 이후 신자가 더 늘어나자 1900년에 지금의 부지를 매입하고 그 자리에 있던 기와집 21칸을 성당(8칸)으로 개조했다. 이때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신부가 공베르(Gombert, 한국 이름 공안국)였다.
공베르 신부는 1922년에 성당을 건립하고 안성 본당이라 이름 지었다. 안성 본당은 한국인에게 친근감을 주고 천주교 토착화를 위해 내부는 서양식인 반면, 구조와 외관은 우리나라 전통 목조 건축양식을 채택했다. 이는 우리나라 초기 성당에서 볼 수 있는 양식으로, 성당 건축사와 근대건축 양식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건립 당시의 앞모습은 현재와 다르다. 앞·옆면의 입구와 박공지붕이 일본풍이었는데, 앞면은 1955년에 고딕식 벽돌조로 성당 종탑부를 증축하면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바꿨다.
안성 본당은 1970년에 대천동 본당을 분할하면서 구포동 본당으로 개명했고, 1985년 6월 경기도 기념물 제82호로 지정 된 것을 계기로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2000년,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기념 성당을 새로 건립하고, 이름도 구포동에서 안성 본당으로 변경했다.

안성 포도의 아버지 공베르 신부 안성성당 하면 공베르 신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국권 회복은 2세 교육에 있다고 판단한 그는 1909년 사립 초등학교인 안법학교(현 안법고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해 자비로 운영했다. 또 프랑스에서 모금한 기금으로 전답을 매입해 가난한 소작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는 등 빈민 구제 활동도 벌였다. 안성이 대표적 포도 산지가 된 것도 공베르 신부 덕분이다. 1901년 성당 마당에 무심코 심은 독일산 포도 묘목이 의외로 탐스러운 과실을 맺자 여러 차례 프랑스를 오가며 한국에 적합한 포도 종자를 찾았고, 성당 주변 토지 50만 평을 매입해 지역 농민들이 포도밭을 경작할 수 있도록 임대해주는 등 적극적으로 보급했다. 이렇게 32년 동안 안성에서 신자들을 품어 안은 공베르 신부는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1950년 11월 12일 압록강 부근 감옥에서 동사하고 말았다. 비록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기는 했지만, 공베르 신부가 뿌린 믿음과 사랑의 씨앗은 안성의 대표 특산물이 되어 해마다 달콤하게 영글어가고 있다. 안성성당은 당시 조성한 포도밭을 아직도 가꾸고 있으니 들러보면 좋겠다.
주소 경기도 안성시 혜산로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