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홍행원’
평택에 중식계의 유명한 ‘왕쓰부’가 있다.
일흔이 넘은 나이지만, 여전히 열정적으로 요리하는 왕쓰부의 노포를 찾았다.
Since 1960, 대를 이어 중식 만드는 집안
한국 노포의 역사에서 중식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에겐 ‘중국집’이라고 부르는 이국적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중식당이라고 하자.
“중국집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거요. 화교들이 거의 기술로 하니까.”
평택의 전설적인 중식당 ‘홍행원(鴻杏園)’의 맥을 잇고 있는 왕본희(王本喜, 74) 대표의 말이다. 그는 평택을 넘어 한국에 둥지를 튼 중국요리사의 산증인이다.
노장 중국요리사를 화교 사회에서는 ‘쓰부’라고 하는데, 그는 현역으로 일하는 몇 안 되는 쓰부 중 한 사람이다. 나이에 비해 아직도 정정하고, 기골이 장대하다.
인터뷰하겠다고 섭외를 하는데 목소리가 아주 기운차고 활력이 넘친다. 실제 만나보니 장사 느낌이다.
내가 이 나이에도 사람 안 쓰고 혼자 해요. 식사보다 요리를 만드니까 혼자 할 수 있지.”
우선 홍행원의 역사를 살펴보자. 아버지 왕기무(王基茂) 씨가 한국(당시 조선)에 온 것이 1910년대로, 일곱살 때 일이다. 한국의 화교는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대거 유입된다.
청나라 군대가 들어오고, 이때 상인도 같이 들어와 비단을 중심으로 포목을 팔았다. 이후 각 분야 기술자와 요리사도 들어오게 된다. 이들이 현재 화교의 선조다.
“아버지는 지금 중국 옌타이시, 그러니까 산둥성 푸산현 사람이에요. 시내 사거리, 평택경찰서 있던 자리가 번화가인데 거기에 홍행원을 열었어요. 그때가 1928년도입니다. 우리 가족은 다 대만 국적이고요.
아들이 셋이었는데, 아버지를 따라 요리를 했어요.”
그가 3형제의 막내였다. 둘째 형도 함께 요리하다가 대만으로 이민을 갔다. 큰형과 그가 홍행원의 맥을 잇고 있다.
큰형은 1960년 평택시 통복시장에 ‘개화식당’이라는 중식당을 열어 독립했다. 그 집 역시 노포다. 최근 큰형이 작고했고, 큰형 아들이 대를 이어 영업하고 있다. 그러니까 왕본희 대표의 조카가 맡아 하는 것.
아버지는 요리, 어머니는 수타의 달인
중식당은 알다시피 ‘짜장면집’이라는 관념으로 우리에게 인식되어 있다. 화려한 요리를 내는 고급 식당도 꽤 있었지만, 전국에 파고든 중식당은 일단 짜장면을 잘해야 했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짬뽕, 볶음밥, 우동, 만두 등 각종 메뉴가
있었지만 으뜸은 역시 짜장면이었다.
“하루에 밀가루 두 포를 쳤어요. 200~300인분 나오지요. 누가 치냐고요? 우리 3형제가 다 수타 기술자예요. 어머니도 수타 달인이었습니다.”
보통 중식당은 업무를 분담한다. 불판이나 칼판 같은 주요 보직이 있고, 주로 면을 뽑는 면판 그리고 보조로 이루어진다. 면판이 바로 수타를 하는 것이다. 그가 한창 요리를 배울 때는 수타가 당연했다.
“밀가루 한 포에 120그릇 나와요. 하루 두 포를 치면 240그릇을 만드는 거죠. 한 번에 10인분씩 만들면 스물몇 번을 치는 셈이에요.”
왕 대표는 힘이 좋아 잡는 양이 많았다. 수타는 힘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가 아무리 잘해도 어머니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아주 기막힌 수타 기술자였다. 중식은 남자의 일이고 수타는 힘으로 하는 것 같지만, 여자도 중식당 주방의 중요한 기술자였다는 증언이다.
물론 이제는 그이 집안 중식당(홍행원, 동해장, 개화식당) 세 곳 모두 수타는 하지 않는다. 수타를 치고 싶어도 이문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왜 세 집이냐면 홍행원은 아버지가, 개화식당은 큰형이 독립해서 연 곳이고, 1983년 내가 독립해서 만든 게 동해장이에요.”
평택 토박이들은 홍행원은 몰라도 개화식당과 동해장은 잘 안다. 홍행원은 아버지 시대 이후 문을 닫았고, 2대에는 두 식당을 주로 운영한 셈이다. 그러다가 동해장도 왕본희 대표가 3대째인 아들들에게 물려주고 다시 홍행원을 복원했다.
“홍행원은 물론, 세 집이 다 장사가 잘될 때가 있었어요. 그때는 어머니가 짜장면용 춘장을 담가서 나눠주셨지요. 항아리가 24개, 엄청난 양이죠.”
춘장은 이미 1960년대에도 사서 쓰는 문화가 있었고, 1970년대에는 일반화되었다. 그렇지만 홍행원 일가는 직접 담가서 썼다. 노랗게 ‘면장’을 담가 숙성시키면 우리가 아는 까만 춘장이 된다. “우리는 캐러멜을 넣어 만든 춘장은 안 썼어요. 일일이 만들어 썼지. 지금은 장을 안 담그지만, 사 온 장을 숙성해서 검게 만들어 씁니다. 우리 집 비결이지요.”
최고 인기 메뉴, 볶음밥 맛의 비밀
그는 열일곱 살 무렵 주방에 들어갔다. 수원과 평택에서 화교 학교를 다니며 공부하다가 일찍이 요리사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배달부터 했다. 짐 자전거에 나무로 만든 배달 통을 싣고 다녔다. 당시에는 주로 관공서 배달이 많았다고 한다. 읍사무소, 군청, 세무서, 경찰서 등이 주요 고객이었다.
중국 음식은 가격이 꽤 나가는 편이라 아무나 주문해 먹을 수 없는 때였다.
“요리도 많이 했어요. 지금 우리 집 유명한 요리들은 아버지 대에서 이미 하던 것이 많아요. 해삼주스, 가지튀김, 샥스핀 요리도 했지요.”
해삼주스란 진짜 주스가 아니라 중국어로 돼지 앞다리를 일컫는 이름이다. 돼지 앞다리를 향신료와 소스에 푹 재워 쪄서 해삼을 곁들여 내는 고급 요리다. 요즘은 동파육처럼 삼겹살에 해삼을 곁들이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왕씨 가문의 짜장면은 매콤한 맛이 나는 유니짜장이 유명하다. 현재 홍행원에서는 요리를 주문했을 때 후식으로만 식사 메뉴를 제공한다.
홍행원 최고의 인기 식사 메뉴는 볶음밥이다. 옛날 식으로 ‘훌훌 날아갈 정도로’ 고슬고슬하게 볶은 밥이 일품이다. 달걀 반숙을 튀기듯 얹어서 내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우리는 지금도 라드를 써요. 돼지기름 말입니다. 이거 보세요(직접 보여주며), 이런 기름이 있어야 요리가 맛있어요. 옛날 중국 음식이 맛있었던 건 이 기름을 써서 그런 겁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동물성 지방이 몸에 나쁘다는 인식이 퍼졌고, 중식당의 라드도 모두 사라졌다. 식용유가 싸지면서 생긴 일이기도 하다. 알다시피 돼지기름은 중식의 핵심이다. 지방을 사서 직접 우려내듯 녹여서 썼다. 중국, 일본, 동남아 등 전 세계 중식당은 돼지기름이 기본이다. 한국은 그런 변화 과정을 겪으며 사라져버렸다.
아니, 아직 홍행원에서는 살아 있다.
“이게 만들기는 번거롭지만, 맛이 여기서 나와요.”
왕본희 대표는 몇 해 전 암 수술을 하고도 혼자 홍행원을 맡을 정도로 건강하다. 식사도 잘한다. 경기도 노포 중식당의 역사는 계속 이어진다.
“잊힌 요리를 중심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요리를 복원하고 싶어요. 옛날 아버지가 쓰시던 웍도 보관하고 있지요. 뭔가 역사적인 집으로 남을 겁니다.”
옛날 중화요리 맛이 그리우면 홍행원과 그의 가족이 운영하는 평택의 중식당을 찾아볼 일이다. 가게를 나오니, 옷에서 불 향이 났다. 오랜만에 맡는 냄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