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도자기 역사를 잇는 마을 이야기 이천 사기막골 도예촌

2024. 10

이천은 ‘쌀의 고장’으로 유명하지만 ‘도자 문화의 메카’이기도 하다.
이천 도자기의 번영을 이끈, 도자공예 마을인
사기막골 도예촌에 가면 장인의 섬세한 손길로 빚은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날 수 있다.

글. 이정은
사진. 전재호
그릇은 인류의 삶에 ‘저장 기술’과 ‘맛’을 선물했다. 흔하디흔한 흙으로 만들어 1,000℃가 넘는 온도를 버티고 탄생한 도자기는 생활의 편의를 도모했고 문명을 발전시켰다. 우리나라에서 토기를 만든 때는 이집트, 서아시아, 인도, 중국과 비슷한 기원전 6000~5000년경이다. 서아시아, 중국의 채문 도기(문양을 채색해 장식한 토기) 문화와는 계통이 다른 빗살무늬토기(빗살이나 동그라미, 점 등 기하학적 무늬의 토기) 문화로 한반도 전역에 넓게 분포하며 발전을 거듭했다. 기원전 1000년경부터는 중국 도자 문화의 영향을 받아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금의 세계적 도자 문화를 구축했다.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구한말의 도공
1960년대의 신둔면 칠기 가마
선사시대부터 토기 굽기 시작한 이천
도자기 품질을 좌우하는 것은 흙과 유약 그리고 불이다. 따라서 흙이 좋은 경기도는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와 관련이 많다. 고려 시대 광종은 재위 기간(949~975년) 중 중국 저장성 웨저우요의 도공들을 받아들여 고려청자를 발전시켰다. 고려에 온 중국 도공들이 처음 청자를 제작한 곳은 지금의 경기도 시흥과 용인 등지다. 백자 문화가 꽃피었던 조선 시대에는 왕실에 필요한 도자기를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관요인 사옹원(司饔院) 분원이 광주에 설치되었다. 경기도에서도 도자 문화가 가장 많이 발달한 이천은 선사시대부터 토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효양산과 장동리, 설봉산성 등에서 무문토기, 선사시대 토기 파편 및 삼국시대 각 나라의 기와와 토기 파편, 대형 항아리와 옹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후 사기막골(사음동)에서는 문양이 없는 순백자 조각이, 점말에서는 순백자와 석기가, 마옥산 기슭에서는 백자 파편과 사발·접시·주병이, 관리에서는 막사발류와 백자 파편, 인화문 분청자 파편들이 출토됐다. 이러한 유적지에서는 모두 가마터가 발견됐다. 조선 시대 중종 25년(1530년)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이천도호부의 특산품으로 백옥(白玉)과 함께 도기를 언급한 것을 보면 고려 시대에 이어 조선 시대에도 이천이 우리나라 도자기의 산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기막골은 예전에 가마터가 다섯 군데나 있던 곳으로, 이곳 도공들이 광주 분원에 차출되어 관요 도자기 제작에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통해 관요의 고급 기술이 자연스럽게 이천의 사기장 집단에 전수되었고, 조선 후기까지도 기술력을 갖춘 도공 집단이 이천 지역에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설봉산 자락에 위치한 사기막골 도예촌 전경
2개의 가마를 중심으로 전통 도자기 재현
그 후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 도자기의 맥은 끊기는 듯했다. 하지만 전통 도자기의 끈을 놓지 않은 선구자들이 있었다. 손꼽히는 한국 도예 명장인 유근형, 지순탁, 조소수 등이 전란 속에서도 살아남은 2개의 가마를 중심으로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재현했는데, 그곳이 바로 사기막골 도예촌이 자리한 신둔면 일대다.
“일본인의 도자기 사랑은 유명하잖아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고 일주일에 수백 명씩 찾아와 도자기를 싹쓸이하다시피 했죠. 2개에 불과하던 가마가 100여 개로 늘어났고, 타 지역 도예인이나 지망생이 이천으로 모여들어 도자기업체 종사자가 급격히 증가했어요. 이 지역 출신 청년들도 너나없이 도예를 배웠지요. 저도 그중 한 명이고요.”
김학승 사기막골 도예촌 번영회장은 “이천 도자기의 전성기는 1970년대와 1980년대라고 할 수 있다”며 “사기막골 도예촌도 1980년대에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마을이다”라고 밝혔다.
사기막골 도예촌의 특징은 전통 도자 기법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전승 도예가 주를 이룬다는 것. 1세대인 고려도요·해강요·광주요 등을 중심으로 많은 장인이 배출되었고, 이들이 독립해 새로운 요장을 차리면서 전통 기법에 현대적 기술을 더해 양적·질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 2022년 대한민국 명장이 된 백산도요 권영배 명장도 사기막골 도예촌에서 전승 도예의 맥을 잇고 있는 도예가 중 한 명이다. 1977년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미술 학도로 이천에 발을 내딛었고, 이를 계기로 도예에 입문해 45년째 도공의 길을 걷고 있는 권영배 명장은 전통 가마를 이용해 주로 백자·분청·진사를 제작하고 있으며, 정밀한 인화 기법과 맑은 색도를 지녔다고 인정받고 있다.
고요한 자연 속 은은한 흙 내음이 풍기는 곳
사기막골 도예촌은 역사와 전통을 인정받아 2017년 전통시장 특화거리로 선정되었다. 도자기 단일 품목으로 이루어진 전국 유일의 전통 마을이자 시장인 셈이다. 가마터를 놀이터 삼아 자란 토박이 도예가부터 대학과 요업 계열 고등학교에서 도예를 공부한 도예가까지 모여 저마다 독특하고 개성 있는 작품을 선보이는 사기막골 도예촌은 마을 광장을 중심으로 50여 개 판매장과 요장이 줄지어 있다.
선과 색이 고혹적인 청자와 백자, 소박한 분청사기, 진사백자, 다완 등 예술성과 작품성은 물론 독특한 디자인과 은은한 색을 지닌 도자기 작품을 비롯해 생활 자기, 뚝배기, 머그잔, 인테리어 소품 등 실용성을 갖춘 도자기도 곳곳에서 자태를 뽐낸다. 김학승 번영회장은 “공방마다 문을 활짝 열어놓아 구경하기도 편하고, 장인의 작품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격도 저렴한 편이라 많은 사람이 찾고 있습니다”라며 “이천9경에 선정될 정도로 경관도 수려하니 가을을 맞아 나들이 삼아 들러보세요”라고 권했다.
그러잖아도 세계 도자인의 축제 ‘2024 경기도자비엔날레’가 10월 20일까지 이천, 광주, 여주 등지에서 열린다. 매년 전 세계 70여 개국에서 1,000명 넘는 작가가 참여하는 전시는 물론 학술 회의, 콘서트, 도자기 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지니 가을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이천 사기막골 도예촌을 목적지 삼아도 좋겠다.
경기도자미술관에 있는 한국의 전통 오름가마

김학승 사기막골
도예촌 번영회장

사기막골 도예촌으로
놀러 오세요
  • 토월도요
    사기막골 도예촌 번영회장인 김학승 장인이 운영하는 공방이다. 도예가의 삶을 천직으로 여기는 김 번영회장은 전통 청자에 현대적 기법을 더하고 섬세하고 유려한 조각으로 기품이 넘치면서도 화려한 작품을 선보인다. 골프와 테니스 국제 대회 트로피를 도자기로 만들어 우리나라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있다. 착한 가격의 멋진 도자기를 소장하고 싶다면 들러볼 만하다.

    주소 경기도 이천시 경충대로 2993번길 28
    전화 010-9767-5564
  • 백산도요
    국내외 전시를 통해 이천 도자기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알리고 있는 권영배 대한민국 명장의 공방이다. 회화를 바탕으로 한 백자와 분청사기의 독보적 존재감으로 인정받고 있는 권영배 명장의 작품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따뜻한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백자 달항아리, 청화백자, 철사, 진사, 진사유 요변, 철유 요변과 분청사기가 대표적 작품이다.

    주소 경기도 이천시 경충대로2993번길 16
    전화 010-6221-6933
  • 고요재
    사기막골 도예촌 입구에 있는 전영주 도예가의 공방이다. 넓은 매장에 다양한 도자기가 진열되어 있으며, 공장 직영으로 도소매 구입도 가능하다. 물레를 이용해 라면 그릇, 항아리, 접시, 머그잔, 꽃병 등을 빚어볼 수 있어 주말이면 가족 단위로 많이 찾는다.


    주소 경기도 이천시 경충대로 2995
    전화 010-6247-7796
  • 다정도예
    고려청자 전문 도예가로서 전통 도자기 계승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김용섭 이천시 도자기 명장의 공방이다. 대표 작품으로 청자 포도문 달항아리, 청자 파도 어문호, 청자 연리문 계영배 시리즈 등이 손꼽힌다. 요즘은 흑토, 백토, 청자토 세 가지 흙을 혼합해 자연의 색을 발현하는 전통 기법인 연리문 기법을 이용한 작품에 매진하고 있다.

    주소 경기도 이천시 경충대로 2993번길 16
    전화 031-631-7600
+ 다른 기사 보기